얼마전 도량의 큰 나무 여러 그루를 잘랐다. 모두 포플라 나무다. 새들이 물어다 준 새싹을 도량 곳곳에 심었었는데, 십 년 새 부쩍 자라 열매를 맺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작은 포도송이 처럼 생긴 그 열매는 목화솜 처럼 터져서 어마어마한 홀씨를 날리기 시작했다. 마치 함박눈 내리 듯 날리며, 눈과 코로 들어가서 성가셨다. 처음 마주친 일이라 이게 무슨 일인가 찾아보니, 중국은 공해를 잡는다고 해서, 이 나무를 가로수로 대량 심었다가, 온 도시에 날리는 홀씨들 때문에 현재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하며, 한국에선 그래서 과거에는 많았지만 지금은 거의 베어내고 없는 실정이라고 했다.
어릴적엔 하교길에 노란 포플라 낙엽 위에서 자주 놀았다. 포플라는 낙엽 향기가 무척 좋다. 그 향기는 기억이 나지만, 포플라나무 홀씨 때문에 괴로웠던 기억은 없다. 관심이 없었던 걸까, 아님 잊은 걸까. 이제서야 포플라나무 홀씨의 위력을 알게됐다. 아무튼, 나 괴로운 건 둘째 치고, 홀씨 날리는 거 질색하는 신도들 때문에라도 열매 맺은 나무는 벨 수밖에 없었다. 푸른 그늘이 아깝고 무엇보다 그 생명력 충만한 나무를 베어내는 게 죄스러웠다. 큰 나무가 괴성을 지르며 쓰러질 땐 같이 비명이 나왔다. 이리 사나운 홀씨가 날릴 걸 미리 알았더라면 안 키웠을까 ? 그렇진 않다. 모두 포기한 건 아니어서,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더 커서 열매 맺기 전, 남은 포플라 나무들도 미리 자르는게 낫지 않냐고, 일꾼이 조언했지만, 나머지도 열매 맺으면 그때 하겠다 했다. 이 중은 오지 않은 내일 일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아니 신경 써봤자 오는 변화를 막을 순 없다는 걸 이미 안다고 해야 맞겠다.
어쨌든 영원히 그대로인 것은 없고, 다 좋은 것 또한 없다. 상승세가 계속될 수 없고 하향세가 반드시 온다. 그래서 인생이 고이다. 여기서의 고란, 유지하고픈 것이 그대로 있지 않아서 괴로운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무상을 이해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다. 특히 병들고 늙고 죽는 변화가 중생들의 최고의 괴로움이다. 그래서 무상이 괴롭지 않으려면 무아를 깨쳐 알아야 한다. 무상, 고, 무아의 진리, '삼법인'의 가르침이다. 저 포플라는 열매였다가 새였다가 영화사 나무였다가 베어져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가. 무엇을 포플라라고 하겠는가. 자연 처처에 이런 진리가 있어, 숲속에 사는 것은 매일이 깨달음이고 공부다. 자연에서 매일 무상을 보며, 매일 무아를 본다. 해서, 뭐든 곧 변할 것을 알고, 내것이라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단 걸 알기에, 굳이 욕심낼 것도, 부족할 것도, 내일에 투자할 이유도 없다.
저 포플라 나무처럼 내일 당장 스러질 수 있는 것이 허망한 삶이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생로병사의 변화는 개개인의 통제권 안에 있지 않다. 하여, 무엇에든 오고 감에 쓸데없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쓴다고 크게 달라지지도 않는다. 신경 안 쓰면 내일이 나쁠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오늘은 내일의 과이므로, 오늘 욕심없이 최선을 다 했는데, 내일 나쁠 일도 없거니와, 나쁘다면 나쁜대로 사는 거다. 어떻게 늘 좋겠는가. 그것이 헛된 욕심이다. 나무를 심고 행복했다면 베어내는 아픔도 달게 치러야 한다. 생이란 다른 생을 죽이지 않고는 지속할 수 없는 잔인한 시스템이다. 삶은 곧, 만물의 희생이다. 흔히 살생, 하면 살인만 떠올리겠지만, 그렇지 않다. 뭍 생명을 해친 것을 통틀어 살생이라고 한다.
물 한 모금에도, 상추 한 잎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있다. 사는 것 자체가 무시무시한 살생의 연속이다. 그걸 최대한 안 하고 살려는 것이 속세를 벗어나 사는 출가인들의 자세다. 안 할 수는 없다. 생명존중을 잊지 않고 되도록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인과가 역연하니, 포플라나무와 함께 살았던 벌레 등, 여러 인연을 살생한, 그 죄값도 받아야 할 것이다. 죄스런 마음을 더는 길은 참회 밖에 없다. '참회는 번뇌의 땔감을 태운다'고 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미생물부터 나비, 토끼, 카요리에 이르기까지, 온갖 생명들이 살고 있는, 영화사의 숲을 더 무성히 만들고 더욱 성심껏 보살피리라 한다. '살생중죄 금일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