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변화’의 내력
▶ 정태수 / 본보 객원편집위원
요즘 나는 평소에 안하던 짓을 참 많이 한다. 먼동이 트면 겨우 잠을 청하던 올빼미형에서 서너 시만 되면 예불모드 공부모드에 들어가거나 하다 못해 꼭두새벽에 헤드셋 끼고 애창곡을 듣더라도 새벽형 흉내를 낸지 꽤 됐다. 중학교 졸업후 담쌓고 살았던 수학과 과학에 가까워지려고 소질은 쥐뿔도 없는 그 방면 유툽 강의를 찾아서 공부하고 지난주 12일(수학)과 13일(과학) 난생처음 GED(미국형 대입검정고시 내지 고졸학력인증시험)에 도전해 두 과목 다 턱걸이로 통과한 것도, 어려서 욕반말반 언어살림 거친 곳에서 자란 탓에 마흔 넘고 쉰 다 되도록 입만 열면 구업이 좔좔 쏟아졌던 내 입에서 그 흔한 “새끼” 소리도 좀체 삐죽거리지 않게 된 것 또한, 날마다는 아니지만 새벽이면 혜연선사발원문 보왕삼매론 천수경 티벳자비송 같은 걸 웅얼거리는 것 모두 예전의 내겐 없던 일이다. 뿐인가. 낼모레도 한두달도 기약할 수 없는 주제에 7,8년 뒤 일흔 전후까지 태권도 5단을 목표로 까마득한 옛날에 매를 맞으며 이를 갈며 했던 그 운동을 태극 1장부터 더듬더듬 다시 시작하질 않나, 노래는 몰라도 악기소질 1도 없음을 아프게 깨달은지 반세기 넘었음에도 온갖 소리 다 내는 키보드를 사서 딴따라따따 궁짜라삐약 뽕짝반주를 익히느라 버벅대질 않나…
별것 아닌 내 변화를 주절거린 이유가 있다. 변화의 동인 내지 계기에 대해 나누고픈 곡절이 있어서다. 지옥 문앞에서 날 오라 손짓한 듯한 내 부실건강 때문이다. 아니 그 이후 벌어진 일련의 고마운 동인들 때문이다. 재작년 6월 폐암3기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에 앞서 기흉 수술을 받은 뒤 한 열흘 묶여있을 때 아내도반이 밤샘근무차 출근하면서 특유의 별것 아니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좋아질 거야., 내가 벌테니 돈 걱정도 말고. 오늘 밤에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10가지만 써봐.” 빌빌댄 끝에 겨우 좀 안정된 직장을 잡았다 싶은 즈음에 폐암이라니 “재수에 옴이 붙어도 증~말…” 이러고 있는데 행운아라니? 열흘 가고 보름 가고 또 며칠 더 가고 혈액검사 등 중간점검 결과가 나왔다. 어른 주먹만했던 종양이 약간 큰 밤톨만큼 줄었고 근 30가지 항목이 거의다 정상범위에 있거나 그 언저리였다. 그때 보인 치료팀장 인도계 의사와 베트남계로 보이는 방사선과 여의사의 반응이 나를 확 깨어나게 했다. 비디오 미팅에서 인도계 의사는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시작부터 (미소 때문에) 눈이 감기고 (부푼 볼 때문에) 양 볼을 덮은 마스크가 팽팽해지고 목소리는 다소 들뜨고… 이튿날 여의사는 스트라익을 잡은 투수처럼 불끈 쥔 주먹을 두어번 펌핑까지 하고…
“사나보다, 사는구나, 살았구나.” 나는 비로소 눈이 찌걱거리고 코가 시큰거렸다. 그리고 1년여. 내 고향 남도 사투리로 좀 사삭스럽단 소리를 듣겠지만 굵고 낮은 음성의 문주란 가수의 노래 “당신이 있으니까” 중 “…이 세상 모~두~가 아름답게 보~이~죠~….” 이 대목이 그리 귀설지 않게 흘러나온다. 만일 그 여름에 백기를 들어버렸다면 적어도 내 눈에 영락없는 부처님이요 보살님인 두 의사를 끝내 몰랐을 것 아닌가. 그 이전 약 60년을 그리 살지 않았던가...
나는 다짐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항암작전을 성공리에 마치면 나는 곧 일어나 같은 처지 환우들의 말동무가 되든지 우연히 알게 된 참전용사 재활센터에서 호흡과 명상과 걷기 등 재활운동 도우미 역할을 하든지 여하튼 기껏 태어나 쌀이나 축내고 갔다는 손가락질은 면하고도 남을 정도의 보람있는 짓을 하리라 결심했다. 부족한 이 칼럼 간판이 감사보은인 연유 또한 그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