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의 관 위에는 열다섯 사람. 럼주를 마시자, 럼주를 마시자.’
럼은 가장 먼저 존재를 안 술이었다. KBS 1TV에서 방영된 만화영화‘보물섬(1980~1981)’ 덕분이었다. 보물섬은 영국 작가 루이스 스티븐슨의 원작을‘베르사이유의 장미’의 데자키 오사무가 연출한 작품이었다. 여관집 아들 짐 호킨스가 우연히 얻은 지도를 바탕으로 보물섬을 찾아가는데, 배의 조리장이 해적 롱 존 실버였고 선상 반란을 일으킨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나는 고작 다섯 살, 술이 뭔지도 잘 몰랐으나 해적들이 부르는 노래와 마시는 무엇인가가 마냥 신기했었다. 이후 그 술이 당밀로 빚은 럼이라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즐기게 된 건 약 20년 전부터다. 모히토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 덕분에 바탕술인 럼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다.
사탕수수의 산지라면 거의 예외 없이 빚기에 럼은 세계적인 술이다. 그만큼 역사도 조밀하고 제품군이며 분류도 엄청 다양하다. 덕분에 칵테일의 모든 바탕술을 럼으로 대체한 럼 전용 바 또한 인기를 누리는 현실이다. 장마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눅눅한 지금 모히토나 피냐콜라다, 다이키리 등 본격적인 여름 칵테일의 바탕술인 럼의 역사를 비롯,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럼의 어원과 기원
럼(rum)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일단 사탕수수를 끓여 만드는 음료 럼불리언(rumbullion)과 ’대소동’이라는 뜻의 속어 ‘럼버스션(rumbustion)’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각각 럼의 재료와 화끈한 맛을 바탕으로 추측한 의미이다. 한편 영국에서는 ‘고품질’을 의미하는 속어로 ‘럼’을 쓰기도 하지만 초창기의 럼이 조악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술의 명칭을 따왔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가운데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 단어들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럼불리언’이 1651년으로 ‘럼(1654)’보다 3년 빨랐다. 럼이 적어도 17세기에는 이미 존재한다는 방증인데 실제로는 이전의 기록도 남아 있다. 마르코폴로의 14세기 기록에 의하면 현재 이란의 위치에서 ‘아주 맛있는 사탕수수 와인’을 대접받았노라고 기록하고 있다. 브라질에서도 1520년대에 럼 양조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럼의 제조와 삼각무역의 역사
럼은 궁극적으로 설탕 정제의 산물이다. 사탕수수에서 즙을 짜내 불순물을 제거하고 결정화시킨 뒤 분리해내는 당밀을 발효 및 증류시켜 만드는 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탕수수 산지라면 어디라도 럼을 빚어 마신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으며 분류도 매우 다양하게 되어 있다. 그런 가운데 럼의 대표 산지로는 카리브해를 꼽는다.
궁극적으로 설탕의 부산물이기에 럼의 유통 및 인기 등은 노예 교역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술은 자국 생산 옥수수로 빚는 버번 위스키지만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에는 럼이었다. 금속 가공이나 술통 제조 등의 기술 발달, 술통의 주재료인 목재의 원활한 공급 덕분에 뉴잉글랜드 지역은 한때 럼 생산과 교역의 본거지였다. 그래서 럼은 삼각 무역의 한 축을 맡았다. 유럽의 무기와 화약 등을 아프리카의 노예와 교환한 뒤 이들을 신대륙에 설탕, 럼 등을 받고 팔아넘기는 형국이었다.
당시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생산된 럼은 위스키처럼 가볍고 부담이 적어 인기를 누렸다. 오늘날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항에서는 독한 럼을 따로 빚어 노예 거래의 화폐로 쓸 정도였다. 카리브해의 럼이 최고라 꼽히기는 했지만 가격과 기복 없는 품질 덕분에 미국 럼은 잘 팔렸다. 미국 독립전쟁 이전의 기록에 의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매년 14L의 럼을 마셨다고 한다.
18세기로 접어들며 설탕, 당밀, 럼, 그리고 노예의 수요가 계속 맞물려 증가했다. 그런 가운데 프랑스가 브랜디와의 경쟁을 막기 위해 자국 식민지의 럼 생산을 금지했으니, 뉴잉글랜드가 반사이익을 볼 수 있었다. 서인도제도의 당밀을 저렴하게 구입해 럼도 싸게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프랑스가 눈엣가시인 본국 영국이 견제 조치에 나섰다. 일단 1733년의 당밀법을 통해 뉴잉글랜드로 수입되는 비영국령산 당밀에 엄청난 관세를 매기려 시도했지만 제대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뉴잉글랜드의 수출품 가운데 80%가 럼이었기에 관세를 준수했다가는 사업을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1764년의 설탕법을 통해 다시 보호무역을 시도했으나 결국 미국 독립전쟁의 단초를 제공하고야 말았다.
미국의 독립 이후에도 럼은 한참 동안 인기를 누렸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1789년의 취임식에서 바베이도스산 럼을 쓰기도 했다. 심지어 유권자들에게 향응으로 제공되기도 했었던 럼은 차츰 인기를 잃었다. 서인도제도의 원료 공급이 어려워지고 위스키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탓이었다.
■바다와 해적의 술, 럼
앞서 ‘보물섬’ 이야기를 했듯 럼은 바다의 술, 더 나아가 해적의 술로 잘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 해적, 해군 할 것 없이 럼을 즐겨 마신 덕분이다.
특히 해군과의 관계는 매우 각별해 ‘해군 도수(Navy Strength)’라는 표준까지 생길 정도이다. 1655년, 영국 해군 함대가 자메이카의 한 섬을 정복해 보급품으로 나가던 술을 프랑스산 브랜디에서 럼으로 바꿀 수 있었다.
선원들에게 보급된 럼은 원래 서인도제도산과 섞은 것으로 영국 도수 100도, 알코올 비율이 57%에 이르는 독주였다. 액체비중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57%는 화약을 적셨을 때 불이 붙는 소위 ‘화약 시험(gunpowder test)’을 통과할 수 있는 최저 도수였다.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영국에서는 57%가 “해군 도수”로서 독주의 한 표준으로 통하고 있다.
바다의 술로서 럼이 입지를 다지는 데에는 명장 호레이쇼 윌슨 제독의 일화 또한 한몫을 단단히 했다. 잘 알려졌듯 넬슨 제독은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사했는데, 그의 시신은 보존을 위해 술통에 럼과 함께 담겼다.
그런데 막상 영국에 상륙해 술통을 열어보니 수병들이 뽑아 마셔 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럼은 많은 별명에 ‘넬슨의 피(Nelson’s Blood)’를 추가했다. 영국 해군에서는 1970년 7월 31일까지 럼을 보급했다.
■럼의 분류
전 세계적으로 빚어 마시는 술이기에 럼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그런 가운데 즐기는 데 도움이 될 분류법을 살펴보자.
일단 숙성하지 않은 럼은 보드카처럼 무색 투명하다. 이를 가볍다고 해서 라이트(light)럼이라 구분하는데 푸에르토리코 등 카리브해 가운데에서도 스페인어를 쓰는 문화권에서 많이 난다. 주로 모히토 등 칵테일의 바탕으로 쓰인다.
한편 럼도 위스키처럼 나무통에 숙성을 시키면 색상이 짙어지는데 중간쯤 숙성된 것을 골드(gold), 그 이상의 짙은 것을 다크(dark)럼이라 분류한다(경우에 따라 캐러멜을 더해 색을 내기도 한다).
다크 럼은 카리브해에서도 영어를 쓰는 자메이카나 바하마 등이 주요 산지이다. 골드나 다크 럼은 원래 그냥(니트) 혹은 얼음을 더해 온더록스로 마시지만 요즘은 칵테일에도 많이 쓰는 추세다.
전반적인 양주류의 도수 기준은 40%인데 이를 넘는 경우 오버프루프(Overproof)라 구분한다. 오버프루프 럼의 경우 75~80%에 이르는 제품들이 있는데 주로 칵테일에 쓰인다. 그 밖에도 계피, 정향, 카르다몸 등의 향신료를 더해 뜨거운 느낌을 강화한 스파이스드(spiced) 럼, 망고, 코코넛, 파인애플 등 열대 과일의 맛과 향을 불어넣은 플레이버드(flavored) 럼 등도 있다.
럼의 사촌 격인 술들도 있다. 카리브해의 프랑스령에서는 당밀이 아닌 사탕수수즙으로 빚은 럼이 있다. ‘럼 아그리콜(Rhum Agricole)’이라 일컫는데 사탕수수의 맛과 향이 좀 더 강하다. 한편 브라질에는 ‘카샤사(Cachaa)’가 있다. 후자는 특히 브라질의 국민 칵테일인 ‘카이피리냐’의 바탕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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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음식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