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여기에서 다시 불제자로’ (4/4-1) / 정영근 붓나다라 열린불교대학 학장
▶ 정영근 붓나다라 열린불교대학 학장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설명했다. 초등학생이 보더라도 틀린 얘기지만 여전히 탈레스는 높이 평가받는다. 그 이전에 호머 같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존재나 신을 동원해서 세상과 만물을 설명했으나 탈레스는 검증할 수 있는 물이라는 것으로 세상을 설명했다. 바로 이 차이다. 그러니 후대의 검증과 한계극복으로 오늘과 같은 과학발전이 있게 된 것이다.
지식의 출발은 신비를 벗어내는 데서 시작한다. 붓다는 수많은 사상들을 섭렵하고 검토한 결과 그 사상들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찾아냈다. 신 숙명 우연 등 증명되지 않은 전제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에 의존하던 기존의 사상들을 붓다는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깨달음에 대해 말로 설명할 수 없다며 종교적 책임으로 돌려놓기도 한다. 깨달으면 안다 내지 가보면 안다는 말의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언어는 불충분한 도구이고 때로는 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언어에 의하지 않고는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 언어는 또 한편으로는 진리에 이르게 하는 이정표이자 길이기도 하다.
붓다도 처음에 깨달은 내용이 너무 어려워 망설이다 그게 아무리 대단해도 중생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해줘야 한다고 설법을 결심한다. 이렇듯 깨달음의 본질은 참된 앎이다. 깨달음은 의미있는 내용이 있어야 하고 또한 공유되어야 한다. 또 자신과 사회의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 깨달았다면서 실천과 행동, 삶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깨달음의 목적과 의미가 상실된 것이다.
깨달음은 감각이나 생각이 없는 마비상태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깨달음은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생각이나 감정이 자연스럽고 바르게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그걸 닫아버리고 단절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선정 등 일상에서 떠난 상태에서만 느끼는 일시적인 평안이나 기쁨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평안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 깨달음으로 바탕이 변하여 절대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은 붓다는 인간으로 살다가 인간으로 죽었다.
붓다가 발견한 연기의 법칙은 붓다의 존재 여부나 깨달은 여부와 관계없이 항상 그렇게 있는 법칙이다. 내적으로 번뇌 고통에서 벗어났느냐 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깨달음을 스스로 검증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답게 행위를 하느냐에 의해서 어떤 사람이 깨달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깨달았다면서 존재의 상태 및 행위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 깨달음은 거짓이거나 의미가 없다.
깨달음은 특별한 사람만 찾을 수 있도록 숨겨진 보물이 아니다. 누구나 자기 안에서 깨달음을 구할 수 있으며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하극인 사람도 걸어갈 수 있다고 믿었기에 붓다는 대중에게 그 길을 제시한 것이다. 어떤 경전에서는 깨달음의 가능성이 없는 존재 무불성을 얘기한다. 저는 그것을 오만을 경계하는 교리적 장치라고 본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던 예수도 아무리 엄청난 죄를 지어도 그 죄를 용서해 줄 수 있지만 오만한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지 않았던가.
요약하면 저는 깨달음을 논할 때 깨달음을 알거나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신비화하고 또 깨달으면 전지전능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절대화하고 또 깨달음은 일부 특정인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사유하는 이런 잘못을 시정해야 깨달음을 이해하는 바른 길이 열리고 모든 대중이 힘차게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출전- 2.26 붓다나라 '깨달음 강연회' 중 정영근 학장 발제문, 요약정리-정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