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버지날 기고 - 어떤 아버지의 감사

2023-06-21 (수) 김선교/자유기고가
크게 작게
매년 6월이 오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옛 생각이 떠오르면서 사무치는 슬픔을 억제할 수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 엘리엇의 ‘황무지’에서는 4월이 잔인한 달이라고 하였는데 내게는 6월이 더없이 잔인한 달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세 번을 연거푸 6월달에 격년(隔年)으로 내게 재앙이 닥쳐왔었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옛 이야기이지만 내게는 수년 전에 발생하였던 것처럼 뚜렷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건들이었다.
첫 번째 사건은 1948년 초등학교 6학년때 엄마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나를 버리고 하늘나라로 가버리신 사건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그때의 내마음 그 누가 알랴. 왜 어린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냐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살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평생 ‘어머니’란 말을 해본 적이 없어 징그럽다고 느끼실 분도 계시겠지만 90세가 다 된 노년인 지금도 ‘어머니’란 말은 내게는 익숙하지가 않다.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으니까.


두 번째 사건은 한반도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겪었던 1950년에 시작된 6.25전쟁이다. 전쟁은 나의 모든 꿈과 과학자가 되겠다는 희망을 송두리채 앗아갔다.
당시 서울에 성북구는 없었고 동대문구 돈암동에 있던 집은 폭격을 맞아 잿더미만 남겨놓아 어렵게 방 하나만 복구하여 부친과 같이 생활하며 지냈다. (당시 부친은 경기도 고양군의 중견공무원이었다)

세 번째 사건은, 철없는 어린 아들을 전쟁 중에 혼자 키우시기 너무 힘드셨는지 1952년 6월 어느날 갑자기 부친이 하늘로 돌아가시니 천하의 고아 가장이 되어 나홀로 의식주를 해결해야 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학업을 접고 갖은 고생으로 주경야독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로 졸업증을 획득했다. 대학은 검정고시가 없으니 야간대학을 졸업하였다. 2.3대 1의 경쟁을 뚫고 공군 장교가 되어 미국 연수를 6개월 다녀오고 6년 근무를 마친 후 제대하였다. 다시 월남에 가서 3년동안 돈을 벌었고 귀국한 후 대기업에 취직하였다.

북남미에 출장을 왔다가 미국에 와서 살면 한국에서 보다 잘 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40대에 아무 기반 없는 이민의 꿈은 무모한 모험이라고 만류하는 친구들의 충고를 뿌리치고 대기업에 사표를 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만 믿고 500달러를 달랑 들고 아무런 연고가 없고 장기체류 신분 보장도 없이 홀홀단신 미국에 왔다.

미국 온 다음날에 야채가게에 취직하여 생활기반을 마련한 후 대기업의 지사를 차렸고 가족들(처, 딸 그리고 아들)을 데려와서, 착한 변호사를 만나 영주권을 획득한 후 미국시민이 되었다.

군에서 배운 기술을 활용하여 작지만 오붓한 회사를 차려 운영하다 지금은 나이 들어 은퇴하여 그런대로 살고 있다. 이만하면 3/4 세기전 6월달에 연속되던 불운에 비하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고 지금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는 좌우명을 굳게 믿고 있다.

나의 잔인했던 6월사(史)를 쓰다보니 나의 미니 자서전이 되고 말았다. 이 글을 쓴 목적은 젊은 나이에 견디어 내기 벅찬 좌절감을 느꼈을 때 현시대 젊은이들이 너무 쉽게 생을 포기(내 주위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사례들을 보고 들으면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나를 미국으로 인도하여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여생을 즐기며 살다가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세상여행 끝나는 날 하늘나라로 가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아름답다”고 고하려고 한다.

<김선교/자유기고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