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앙 에세이 - 마음이 뭐길래

2023-06-19 (월) 홍효진/뉴저지 보리사 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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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김동명 시인의 ‘내 마음은 호수요’에 나오는 첫 구절. 김동명 시인의 마음은 어떻길래 호수나 촛불, 바람이 되어 사랑하는 님 주변에 머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고, 김소월의 마음은 어떻길래 떠나는 님이 사뿐히 즈려 밟고 지나도록 하려는 걸까.

참 알다가도 모를 게 마음이 아닐 수 없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의미는 다 알고 있듯이 일체는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뜻. 플라시보 효과가 있고,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의 뿌리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렇듯 마음만 잘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대상을 만나야만 작용한다.
대상을 만나야만 마음은 작용한다는 것은 서양학에서 보면 불교는 순수 인식론이 없다는 주장을 하게 한다.


서양의 학문은 흔히 존재론과 인식론으로 나누는데.. 존재론이란 과학이라 할 수 있고, 인식론은 사람을 몸과 정신인 2원적 존재로 볼 때 몸에서 정신 작용만 뚝. 잘라 그것을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학문이 된다. 그에 반해 불교는 몸의 감각 작용이 바탕으로 마음 작용이 일어난다는 입장이니 서양식 순수한 인식론은 있을 자리가 없다. 문제는 그런 불교의 인식론을 서양식 인식록으로 이해하는 게 문제다.

영화 ‘매트리스’를 보면 몸은 의자에 묶여 있고, 의식이 빠져나와 마치 의식이 몸을 만들어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감각 작용에 의해 인식이 생기지만 매트리스와 같은 세계가 ‘법화경’에 나오는 것은 인식 주체는 기억하는 인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체유심조란 인식이 인식을 만들어 낸다는 매트리스적인 것까지 포함한다. 그럼에도 창조신처럼 마음이 능동적으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매트리스 세계는 마음 어디에선가 일어날 뿐 존재 세계에서는 어림도 없다. 석가모니 이래 천여 년 동안 인도 주류 종교로 자리하고 있던 불교가 다시 힌두교에게 주류 자리를 물려주기 시작할 때 힌두교 학자들은 불교의 무아를 비판한다.

“무아라면 콩 심은 데 팥이 날 수 있어야 하고, 사자가 낳은 새끼가 베이비 여우가 나올 수 있어야 하는 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으니 무아는 참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비판했을 때 당시 인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교를 무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 부처님 제자 가운데 설법 제일인 부루나 존자의 후배로, 일체는 감각 작용에 의해 생기고, 감각 작용을 일으키는 12처는 마음을 연해 생긴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자가 열 명, 아니 세 명만 있었더라도 12세기 이후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지금 스리랑카나 버마, 태국에서는 불교가 주류 종교이지만 정작 인도에서는 힘을 못쓰는 이유도. 감각작용 가운데 의식과 연결되는 마음인 12처를 감각기관인 6근과 실재하는 대상의 6경과 같은 것으로 가르칠 뿐 마음을 연해 생겼다는 것을 깨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일체유심조는 발 없는 처녀 귀신이 멋대로 신통력을 부리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감각기관이 대상과 만나면 그 즉시 12처인 마음이 일어나 감촉(3사화합)과 느낌이 생기고 따라서 일체 인식이 생긴다는 것이다.

원효 대사가 구더기가 있는 해골에 들은 물을 시원하게 마셨다가 해골 물임을 알고 토악질을 하다 깨친 게 일체가 마음에서 생겼다는 것 아닌가. 이때 깨침이란 일체는 마음인 12처에 의해 생긴 것을 깨우친 게 된다.

<홍효진/뉴저지 보리사 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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