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나 불만 따위를 절제하거나 극복하지 못해 심하게 화를 내는 것을 성질부린다고 말한다. 성질을 부리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일에도 날카로워져서 성질을 낸다. 사실 성질을 부리는 것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참지 못해서 그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헌데 성질이라는 말은 원래 나쁜 말이 아니다. 성질은 사람이 원래 지니고 있는 본바탕이다. 사람은 감정의 존재이기에 살아가면서 누구나 어느 정도 화를 내고 성질도 부린다. 나도 예전에 한 성질 부렸다. 내 뜻대로 안 될 때, 교인들이 마음을 몰라주고 오해할 때, 과도한 사역으로 영육간 지치고 힘들 때, 정성 다해 섬겼는데 주님께서 열매 안 주신다고 여길 때 성질내곤 했다. 불의하고 부당한 일을 목도할 때도 성질냈다. 내가 성질낼 때 그 대상은 주로 집사람이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함부로 성질낼 수는 없기에 만만한 집사람이 성질부림의 타겟이 되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예전만큼 성질을 부리지 않는다. 세월 가면서 성질이 많이 줄었다. 아니, 성질낼 힘이 약해졌다. 성경은 분(성질)을 내는 것을 막지 않는다. 헌데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있는 동안만 그리하라고 명한다. 이유는 성질을 부림에는 반드시 부정적 열매들이 있기 때문이다.
도에 지나치게 성질부리면 행복감, 만족감, 평온함이 허물어지면서 정신건강에 안 좋다. 신체적 건강에도 해롭다. 대부분 육신의 병은 정신적 질환과 관련이 있다. 성질내면 시도하는 일이 제대로 안 풀린다. 모든 일은 마음이 평안해야 결과가 좋은데 말이다. 또 자신의 가치와 품격도 떨어진다. 성질내는 만큼이 자신의 인격 수준이다. 또한 인간관계에 악영향을 끼치어 주변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분노 잘하는 사람에게 누가 선뜻 다가가겠는가? 그리고 믿음이 안 자라면서 거룩과 성결에 이르지 못한다. 분노는 믿음의 역사를 가리고 방해한다. 종내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고 그분 영광이 추락한다. 약 1:20에,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했다. 이토록 화를 못 참고 성질을 부리면 종내는 자신이 다치고, 남도 다친다. 모두가 상처투성이고 주님의 영광도 가리워진다.
기독자들이 한순간 성질내어야 할 경우들이 있다.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서, 주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개혁을 위해서, 의로운 사회건설을 위해서 등이다. 즉 의분의 경우이다. 허나 그런 경우들을 제외하곤 성질을 제어해야 한다. 성질나게 하는 사람, 사건, 환경들에 대해서 우리들은 어찌할 수 없지만 스스로 성질내는 것은 내주하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조절할 수 있다. 성령께서는 단지 틀리지 않는 삶을 넘어 성숙한 삶으로 인도하신다.
성질이 솟구칠 때 잠시 멈추고 판단해 보라. 그것이 정말 성질낼 일인가를.. 이내 성질냈음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또한 성질날 때 좋고 행복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려 보라. 하면 성질만이 아니라 감사도 우러나올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생각하시라. 주님은 지금 우리들의 삶을 보시고 분노하시고 성질부리시고 당장 심판하셔야 하는데도 길이 참으신다. 주님 닮길 원한다면 성질내는 것이 정말로 부당하지 아니한가? 성질날 때는 오히려 기도하시라. 성질난다고 기도를 거부하면 평생에 얼마나 기도할 수 있을까? 화나서 기도가 안 될 건 싶어도 무릎 꿇으면 그 순간 주님이 역사하신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빌 4장7절)
부당하게 성질내는 것은 올바른 삶의 태도가 아니다. 특히 주님 앞에 가당치 아니하다. 이방 바벨론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처사가 심히 마음에 안 들어 잔뜩 성내는 요나에게 주님은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욘4:4) 물으셨다. 성질부림은 인격과 믿음, 인생과 삶을 유해하고 무익하게 만든다.
못된 성질들을 십자가에 부디 못 박고 죽이자. 십자가는 정과 욕을 위시 혈기, 분노, 다툼 등의 모든 옛지체들을 못 박는 도구이다. 성질을 죽이고 살아간다면 성질 죽어 나간 그 자리에 안연함, 평안, 행복, 여유, 웃음이 몰려올 것이다. 주여, 이 못난 혈기, 성질을 철저히 죽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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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택규 목사 (산호세 동산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