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 새내기 스님 시절, 그는 한국불교 정화운동(일제불교 잔재 대처승 배제, 비구승에 의한 종단 재건, 한국불교 전통 재건, 불교근대화 운동)의 최일선 행동대원이었다. 1970년대 들어 그는 총무원 국장급 요직을 맡는 등 일찌감치 조계종의 젊은 기수로 자리잡았다.
그러던 중 들이닥친 1980년 10.27법난. 정보를 미리 입수한 그는 부랴부랴 미국(LA)으로 피신했다. 곧 샌프란시스코로 옮긴 그는 몇몇 불자들과 함께 셋집도량을 열고 전법활동에 들어갔다. 여래사의 시작이다. 여래사는 금방 북가주 한인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했다.
설조 큰스님 얘기다. 미국에서도 종단개혁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던 스님은 1994년 조계종 사태 때 한국으로 호출된다. 개혁의회 수석부의장을 맡아 오늘날 조계종의 틀을 구축하는 각종 개혁조치들을 주도했다. 이후 불국사 주지, 법보신문 사장 등을 맡으며 개혁불씨를 계속 지폈고 여래사로 되돌아온 뒤로도 수시로 한국을 방문해 때로는 기자회견으로 때로는 단식정진으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자평했던 개혁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2018년 여름, 스님은 조계사옆 우정공원 천막도량에서 종단적폐 청산을 주장하며 단식정진에 돌입했다. 의료진과 제자들에 의해 강제로 중단될 때까지 기록적 폭염 속에 무려 41일간 이어진 노스님의 목숨을 건 투쟁에 불교계는 물론 이웃종교계와 일반시민들 사이에서도 호응이 잇따랐다. 스님을 응원하기 위해 흑산도에서 가덕도에서 상경한 이들도 있었다 한다. 요지부동 버티던 설정 총무원장이 중도사퇴했다. 스님의 중단없는 계란투척에 권승집단이라는 큰바위가 흔들리는 듯 쪼개지는 듯했다.
근 5년이 흐른 지금, 그해 여름 뜨겁게 타올랐던 개혁불길은 희미한 옛추억이 돼버린 것 같다. 스님이 적폐 중 적폐로 지목했던 권승은 더욱 막강한 실세가 되어 조계종을 쥐락펴락 호령한다고 한다. 반면 설조 큰스님은 '조용히 제적'됐다, 개혁물결에 동참했던 다른 몇몇 스님들과 함께.
“그때 몇이 내게 이의신청을 하라 그래요. 그래 내 그랬어요. 일제하 독립투사들이 조선총독부에 허가받아가며 (독립운동을) 하느냐고. 처자식 있는 독립투사들도 목숨을 걸고 하는데 명색 수행자가 이의신청은 무슨…”
여래사의 미래를 책임질 상좌(승원 스님)가 초기불교 심화학습을 위해 한국에 가 있는 동안 5달째 여래사를 지켜온 설조 큰스님은 일요법회를 마친 16일 오후 여래사 응접실에서 기자를 맞아서도 승적박탈 따위에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대신 스님은 비보도를 전제로 일반에 별로 알려지지 않는 ‘2019년 초 수십일 단식’ 비화를 장시간 들려줬다. 예기치 않은 세력의 예기치 않은 개입으로 거의 8부능선을 넘은 것 같던 종단개혁이 제자리걸음 내지 뒷걸음치게 된 대목에 이르러서는 분노와 실망과 회한과 허탈감이 뒤섞인 감정이 전해졌다.
개혁의 불길은 언제 다시 타오를 수 있을까. 대답 대신 스님은 엷은 미소로 가름했다. 불교계를 너머 대한민국도 위기임을 지적하며 스님은 “이럴 때 중심을 잡아줄 어른들이 필요한데… 전에는 함석헌 선생 김수환 추기경, 문익환 목사 같은 분들이 계셨는데…”라고 아쉬워한 뒤 “일제 때 왕실의 내탕금보다 많은 돈을 주물렀던 천도교가 5대 종교에도 못들 정도로 위축된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불교계도) 돈과 힘에 순치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강을 묻는 질문에 “단식할 때 000원장이 뇌세포는 한번 상하면 복구가 안된다고 그만 하라 그만 하라 그랬는데, 그 후유증인지 기억력이 가물가물하고 얼굴을 잘 못알아봐요, 관절도 좀 안좋고”라면서도 웃음 속에 “나이에 비하면 뭐”라고 덧붙인 스님은 오는 29일 상좌 승원 스님이 돌아오면 5월초에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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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