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의 생각 - ‘수박’ 유감

2023-03-10 (금) 폴 김/재미부동산협회 상임이사·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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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에 버금갈 정도로 쎈 느낌의 ‘수박 칠적(七賊) 처단’ 이라는 포스터가 최근에 SNS를 통해 등장하더니 그 확산세가 심상치 않다. 지난 달 27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국회 체포동의안 표결을 함에 있어 민주당내 이탈표에 대해 이 대표의 강성 지지층인 소위 ‘개딸’들이 공천 살생부 명단을 만들어 배포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일부 친명계 의원들이 여기에 가세하면서 민주당은 큰 내홍을 겪고 있다.

사실 수박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수박은 서부 아프리카가 원산지로서 서역을 거쳐 고려시대 충렬왕 때 원나라를 통해 들어와 무더위를 식혀 주며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여름철의 대표적인 과일일 뿐이다. 이런 수박이 정치권에서 비아냥의 언어로 제일 먼저 사용된 곳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 인데, 6.25 전쟁 후 숨어있는 공산주의자를 겉은 녹색이면서 속은 빨간 수박에 빗대면서부터이다.

이렇듯 부정적인 의미를 더불어 지닌 ‘수박’이라는 용어를 민주당이 스스로 전유물처럼 사용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작년에 민주당이 6.1 지방선거 참패 이후 극심한 계파간의 갈등이 이어졌을 때, 이재명 책임론을 언급한 이원욱 의원에 대해 강성 지지자들이 한동안 사라졌던 ‘수박’이란 단어를 다시 꺼내 들어 그를 단죄하려 들자, 이 의원이 페이스북에 수박 사진과 함께 “수박 맛있네요”라는 글을 올리면서 논란의 불을 지폈다.


이 때부터 ‘수박’은 친명계 지지자들이 이낙연 전 대표측을 비롯한 친문계 정치인을 비난할 때 쓰는 은어로 자리매김했다. 이에 우상호 비대위 위원장은 ‘수박’이라는 단어의 사용금지까지 천명하는 우스꽝스러운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1년이 채 되지도 않은 이 시점에서 민주당은 도로 ‘수박’이 풍년을 맞았다. 넝쿨채 들어 오다 못해 수박에 깔려 죽을 판이 되었다. 한여름 바닷가에서 캠프 파이어 주변을 친구들과 둘러 앉아 기타치고 노래하며 깨먹던 수박의 추억이 백주대낮 아스팔트 거리에서 혐오에 가득찬 발길질에 짓밟히고 말았다. 뒤늦게 이대표가 직접 자제를 요청하고 나섰지만, 개딸들에 맞서 이대표의 사퇴 및 출당, 제명을 요구하는 청원글이 올라오는 더욱 복잡해진 당내 사정을 감안할 때 분열과 반목의 불꽃은 쉽게 사그라들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표리부동, 내로남불의 이중성이 어찌 민주당 내에만 있는 현상이겠는가? 국화와 칼이 현란하게 난무하는 국제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사회 곳곳에도 겉과 속이 다른 모습들은 은근히 만연해 있다. 그런 가운데 자칫 불미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던 이번 38대 뉴욕한인회장 선거는 우리 한인 커뮤니티 구성원 모두가 서로서로 수박꽃의 꽃말처럼 ‘큰 마음’을 내어 원만한 결실을 맺도록 이끌었다. 아마도 올 여름 뉴욕의 수박은 엄청 달고 시원하지 않을까 기대된다.

<폴 김/재미부동산협회 상임이사·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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