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계 안팎 인식차 너무 커 쉬쉬해온 이슈들
2022-11-10 (목)
정태수 기자
10년 전, 북가주를 방문한 한국의 저명 불교학자 김00 교수가 어느 한인사찰에서 근 2시간에 걸친 불교특강을 마쳤을 때다. 강의중 호국불교 얘기가 나온 것에 덧대어 기자가 물었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이 왜군을 살상한 것은 불상생계에 비춰 어떻게 봐야 하는가.”
김 교수 또한 그런 생각을 해봤는지 아니면 다른 어느 자리에서 그런 질문을 받고서 생각을 해본 것인지 지체없이 답변을 내놨다. 대강 다음과 같은 기조였다. “불살생 계율을 어긴 것은 맞지만 여느 살인과는 다르다. 왜군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더 많은 살생을 할 것 아닌가. 때문에 훨씬 더 많고 무자비할 왜군의 살생을 끊어주려는 자비의 마음으로 부득불 왜군을 살생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당초의 의문이 말끔히 풀리지는 않았지만 나름 가치있는 문답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역사를 좀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불교계에서는 좋게 얘기되는데 실제로는(역사적으로는) 정반대로 얘기되는 인물과 사건이 한둘 아니다.
‘한국불교=호국불교’ 등식도 그렇다. 고려 때 몽골군 장수 살리타이를 척살한 김윤후 승병장도 있지만 호국불교 하면 대체로 임란 당시 항일투쟁이 워낙 강조되다보니 부지불식간에 불교계가 일제하 독립투쟁에도 앞장선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만해 스님이나 용성 스님의 항일운동 가담은 매우 이례적이고 일제에 부역한 흔적이 도처에 널렸음을 보여준다. 이를 두고 혹자는 조선조 500년간 한양 도성출입조차 못하고 천민 취급을 받던 승려들이 속셈이야 어떻든 그런 차별을 철폐한 일제에 협력한 것은 동정의 여지가 있다고 변호한다.
임진왜란 후, 보다 정확히는 정유재란 후, 사명대사가 일본에 가 조선인 포로 약 3천명을 데려온 것과 관련해서도 위대한 외교적 성과라고만 상찬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일본에 남아 삶의 질이 향상된 포로들과 조선에 돌아와 ‘여전히 비천한 삶’을 산 포로들을 비교해서 나오는 비판이다. 실제로 오늘날까지 일본의 도예산업을 이끌면서 대대로 영웅대접을 받아온 조선인 도공 모모씨 가문의 조상은 임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갔다 눌러앉은 뒤 훗날 몰래 조선에 들어와 형제들과 왕년의 도자기 동료들을 대거 일본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조선중기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도 불교계에서는 승과부활 등 불교중흥에 힘썼다는 이유로 높은 점수를 받지만 역사적으로는 나이어런 왕을 대신해 섭정하면서 부정부패 독재전횡 등 패악질로 낙인찍혔다. 일제하 독일박사 1호로 유명한 백성욱 박사 역시 불교계에서는 거의 생불로 추앙받지만 상당수 현대사 연구자들은 그가 이승만 정권하 내무장관으로서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재가했다며 살인장관 딱지를 붙이고 있다. 이렇듯 불교계의 시각과 일반적 시각이 상충되는 사례들은 이밖에도 수두룩하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혹은 논쟁 자체가 귀찮거나 두려워서 쉬쉬해온 이같은 민감이슈들을 편견없이 걸림없이 두려움도 없이 다룰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들의 '생각근육이 정상적으로 강화'되지 않을까 싶다.
<
정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