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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한국과 2022년 미국

2022-08-31 (수) 남상욱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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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은 나에게 잔인한 계절로 남아 있다. 1997년 12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는 1998년으로 넘어 오면서 가시화됐다. 1997년 12월부터 1998년 1월 사이에 약 3,000여 한국 기업들이 도산했으며, 실업률은 3.1%에서 4.5%로 폭등했다. 당시 모 대기업 대리였던 내게도 IMF 외환위기는 ‘구조조정’이나 ‘정리해고’라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침에 출근하면 컴퓨터를 켜서 회사 사내망에 접속해 메일을 확인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지만 컴퓨터를 켜는 일 자체가 두려움이었고 공포였다. 1달에 1번꼴로 정리해고자의 명단이 발표됐고 이는 팀장에게서 온 ‘면담 요망’이라는 제목의 이메일로 각 개인에게 전달됐다. 팀장의 면담 요청 이메일을 받은 직원은 정리해고 대상자라는 의미다.

팀장의 면담 요청 이메일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오늘은 살았다’라는 안도감에 쓰러질 것 같이 온몸에 힘이 빠졌던 기억이 있다. 퇴근 후 저녁 시간엔 회사 근처 술집에 들러 살아남은 자들과 생사 확인을 하면서 쓰디 쓴 소주로 내일의 정리해고 불안감을 달랬다. 정리해고의 두려움은 아직도 내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이같은 트라우마를 소환하는 일들이 2022년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장기화되면서 경기침체 우려가 제기되자 미국 내 기업들이 감원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 포드 자동차는 3,000명을 감원 중이라고 밝혔다. 전기차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기 위한 인력 구조조정이라는 이유에서다.

올해 들어 선제적으로 고용 축소에 나섰던 업종은 정보기술(IT) 산업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호황을 구가했던 기술기업들은 공격적으로 인재 확보에 나섰다. 그러나 미국 중앙은행(Fed)의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기술기업 주가의 하락, 성장성 둔화 우려 등을 맞자 이들 기업은 대규모로 계획했던 신규 채용 계획부터 축소했다. 기존 직원들도 정리해고를 통해 감원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 트위터, 쇼피파이, 오라클, 메타(옛 페이스북) 등 기술기업들이 인력조정 흐름에 앞장섰다. 세계 최대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기업인 넷플릭스는 지난 5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전체 인원의 4%의 직원들을 정리해고 했다. 넷플릭스의 가입자 수는 1분기와 2분기에 연속해 줄어들었다.

암호화폐(가상화폐) 가격, 증시가 급락하면서 미국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인 코인베이스, 주식거래 플랫폼 로빈후드도 정리해고에 나섰다. 미국 전기자동차 기업인 테슬라, 리비안 등도 마찬가지다. 미국 최대 차량호출 업체인 우버도 신규 채용을 사실상 중단했다.

세계적인 대기업들까지 감원이라는 최후 수단을 동원해 긴축에 나서게 한 것은 불투명한 경제 상황이다. 여기에 미국의 가파른 금리 인상으로 촉발된 달러화 ‘초강세’ 역시 기업들을 긴축에 나서게 한 요인이다. 강달러는 미국 대기업들이 해외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이익에 환차손을 발생시켜 결과적으로 수익성을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미국 기업들의 정리해고에 의한 감원 사태는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컨설팅기업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가 지난달 여러 산업군에 속한 미국 기업 700여곳의 경영진과 임원을 대상으로 정리해고에 의한 감원 진행 또는 계획 여부를 설문조사한 결과 50%가 “그렇다”고 답했다. 또 채용을 동결했다는 곳은 52%, 채용 제안을 백지화했다는 곳은 44%였다. 인력난 속에 인재 확보를 위해 지급하던 신규 직원 상여금을 없애거나 줄였다는 곳도 46%였다.

아무리 미국의 노동 시장이 유연하고 여전히 일자리 창출이 꾸준할 만큼 강하다고 해도 정리해고를 당한 실직자들의 현실은 늘 어려운 법이다. 매월 급여에 생존을 의지해야 하는 월급쟁이들에게 정리해고는 트라우마로 남을 수밖에 없으며 그 회복의 시간도 오래 걸리는 법이다.

이제 1998년의 직장 동료들 중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직장을 그만둔 지 오래다. 잘 버티어 내도 50세를 전후해 모두 명예퇴직을 했다. 명예퇴직은 정리해고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나마도 안부를 물을 수 있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24년 전에 정리해고를 당한 뒤 안부를 알 수 없는 동료들의 얼굴들이 내 기억 속에서 어른거릴 때 내 마음 한 구석엔 미안한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다.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소주 한잔을 기울이면서 같이 울어주지 못했던 아쉬움과 후회가 내 마음 속에 트라우마로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1998년의 한국과 2022년 미국은 다르지만 서로 닮아 있다.

<남상욱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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