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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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등(無盡燈)] 여기는 어디인가

2022-08-25 (목) 동진 스님(SAC 영화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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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전 8월 31일, 캘리포니아에 처음 왔다. 인생계획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하안거 해제 후, 병중의 전임자에게 연락 받고 갑자기 왔기에, 미국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 더군다나 규율 철저한 산중의 선방에 있다가 나와서, 2007년 현재, 속세에 대한, 특히, 미국 실정에 대한, 아무런 최신 정보도 없었다. 정보를 가질 이유도 없었다. 고작 2개월 예정이었다. 성격상 어딜 간다고 보따리를 미리 싼다거나, 사전 정보를 답습한다거나 그런 편이 아니어서, 미국 절에 대한 정보라든가, 그런걸 미리 알아볼 염도 못냈다. 그러고 싶어도 시간도 없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다. 절이 있다니 있겠지, 했다.그 '절'에 대한 첫 인상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시 속세로 나와 놀란건, 도스에 활자 찍던 컴이 윈도우즈 95라는 신세계로 변한 거였다! 그거 말곤, 놀랄 게 별로 없었는데, 미국 절을 보고 놀랐다. 캘리포니아를 보고도 놀랐다. '머리에 꽃을 달' 작정은 아니었지만, 내 세상 속의 캘리포니아는 노래나 영화 속의, 누구나 꿈꾸는, 그정도. 그러나 그런 캘리포니아는 어디에도 없었다. 바깥 세상엔 그런 캘리포니아를 살고 있는 이도 있겠지만, 이 중의 세상 속엔 예전에도 지금도 없다. 캘리포니아 거주 15년차의 세상 속엔, 살기 힘든 거친 캘리포니아 뿐이다. 실체를 몰랐으면서, 왜 미국이 낯설지 않은 나라였는지, 아는 거라곤 없으면서, 마치 미국을 알고 있는 양, 이웃 오듯이 쉽게 왔는지. 아프리카를 갔대도 그랬을까 ? 이것이다, 사람들이 쉽게 속고 사는 것이. 알고 있지 못한데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우리에겐 이미 사대화된 미국이 있었다. 이것이 참 무서운 일이다. 정신 차리고 있어도 자꾸 속는다. 알고 있다,는 것이 '이름', 뿐임을 재빨리 눈치 채지 못하면, 인생 내내 속으며 살아야한다. 누구에게나 미국을 아느냐고 하면, 모두가 안다고 할 것이다. 뭘 안다는 건지 모르지만, 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 때문에 인생은 괴롭다. 아는 게 많으면 세상 살이 쉬울 거 같지만,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다. 부자를 알아서, 명문대학을 알아서, 갑과 을을 알아서, 잘난 걸 알아서, 처처에서 괴롭다. 그 앎이 다른이가 가진걸 못가졌다 여기게 해서, 그 앎이 더럽고 힘든 것을 싫다고 여기게 해서, 못났다고 느끼게 해서, 남들의 우위를 알게 해서, 부당하다 여기게 해서...괴롭다. 그런데 알고보면 그게 사실은 자기 세상에 속는 것이다. 죠지 워싱튼 부터 미국 역사를 꿰뚫어 알았다고 해서, 미국 살이가 더 쉬웠을까. 아니다. 그 앎은 온전히 당신만의 것이다. 해서, 남의 세상에선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의 앎은 남들에겐 별로 관심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남에게 인정받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자꾸 알리려 하고, 몰라주면 괴롭다. 몰라줄만한 자리에 있음에도, 알아주길 원해서 고통이다. 전에도 15년 지난 지금도 이 중은 미국을 모른다. 미국이라고 머 특별히 다를 것도 없고, 그저 산중에서 나무 심고, 참선 하고, 기도하고, 법회 하고, 한국 절에서와 똑같다. 모르고도 열심히 잘 살았다. 그 미국 15년차에 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여전히 모르겠는 우리 신도에게 처음으로, 여기 와주어서 고맙단 인사를 받았다. 처음 온 날을 찍어 기억해준 것이 큰 울림을 주었다. 그들을 향한 내 진심이 이제사 통했는가, 하면서도, 혹여 이 중도 바깥이 나를 알아주길 원했나, 오래 생각케 하였다. 아무튼, 새삼 돌아봐도, 이 중은 미국을 처음보다 더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 여기가 어디여도 상관없다. 바깥 어디,는 중요치 않다. 아프리카에 살아도 똑같이 살았을 것이다. 여기는 영화사다. 여기, 를 살 뿐이다. 그래서 남과 비교할 일도, 남보다 못할 일도, 남보다 억울할 일도 없다. 이것이 '무안이비설신의' 이고, '무색성향미촉법'이다. '너'와 '나'의 경계가 없는 삶이다. 그래서 부처님 세상에서 살면 자유다. 시비의 바깥 세상과는 아주 다르다. 이 자리를 모두가 알았으면 한다. 하여, 부처님 세상에서 자유를 찾았으면 한다. 그 자리서 바로 행복이다.

<동진 스님(SAC 영화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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