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종교인 칼럼>지혜는 나의 연인, 제인 구달을 추모하며

2025-10-15 (수) 0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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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식 목사/밀피타스 세화교회

창조 질서. 이 말을 들으면 당신은 어떤 감각을 느끼는가? 따뜻한 숨결인가, 아니면 차가운 쇠사슬인가? 이상하게도 하나님이 생명의 리듬으로 선물하신 이 아름다운 언어는, 오랜 세월 동안 누군가를 억누르는 도구로 전락해왔다. 가부장제는 이 말로 여성을 종속시켰고, 권력은 이 말로 약자를 배제했으며, 탐욕은 이 말로 자연을 착취했다. 그렇게 창조 질서라는 말은 생명을 살리는 언어에서 죽음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본래 창조 질서는 억압이 아니라 조화였다. 낮과 밤이 손을 맞잡고, 계절이 춤을 추며, 생명이 순환하는 그 리듬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깃들어 있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 선언은 자유와 번영의 고백이다. 모든 피조물이 제 자리에서 빛나고, 서로 의존하며, 함께 살아 숨 쉬는 그 아름다운 질서 말이다.


잠언은 이 창조 질서의 심장부에 지혜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것도 그냥 지혜가 아니라, 인격을 가진 지혜, 연인처럼 우리를 부르는 지혜를 말한다. 잠언 8장은 마치 사랑 편지처럼 읽힌다. 지혜는 광장에서, 길목에서, 대문에서 우리를 부른다. "내가 여기 있어요. 나를 사랑해주세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지혜는 그 곁에서 춤추며 기뻐했다고 한다. 창조는 폭력이 아니라 축제였고, 명령이 아니라 춤이었다. 지혜는 그 춤의 파트너였다.



그리고 잠언 9장에서 지혜는 집을 짓고 잔치를 준비한다. 일곱 기둥을 세우고,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섞고, 상을 차려놓는다. "오세요, 모두 오세요. 내 밥을 먹고 내 포도주를 마시세요." 지혜의 초대는 배타적이지 않다. 자격을 묻지 않는다. 다만 사랑하기를 원할 뿐이다. 반면 어리석음도 여인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사람들을 부른다. 그러나 그녀의 집은 음부로 통하고, 그녀의 잔치는 죽음으로 끝난다. 우리 앞에는 두 연인이 서 있다. 하나는 생명으로, 하나는 파멸로 인도한다.


현대 문명은 어떤 연인을 택했는가? 우리는 지혜를 외면하고 탐욕과 쾌락을 연인 삼았다. 그 결과가 기후 위기다. 빙하가 녹고, 바다가 끓고, 생명이 멸종하고 있다. 우리는 지혜가 속삭이는 절제와 공의와 정직의 언어를 무시했다. 대신 "더 빨리, 더 많이, 더 크게"라는 어리석음의 노래에 취했다. 지혜와의 사랑이 끊어진 자리에서 세상은 무너지고 있다.


바로 이 시점에, 2025년 10월 1일, 제인 구달이 우리 곁을 떠났다. 91년의 생애 동안 그녀는 지혜를 연인처럼 사랑한 사람이었다. 침팬지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와의 만남에서 시작된 그녀의 여정은,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매일을 지구의 날로 여기라." 그녀의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혁명적이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세상을 바꾼다는 그녀의 신념은, 잠언이 말하는 지혜의 초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사랑과 희망. 제인 구달이 남긴 이 두 단어는 지혜가 우리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


신앙도 결국 지혜와의 사랑이 아닐까.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미워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면서 피조세계를 파괴한다면, 그것은 거짓 경배다. 지혜와 사랑하는 것은 추상적 명상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이다. 절제하고, 나누고, 돌보고, 환대하는 것이다. 제인 구달이 침팬지를 사랑한 것처럼, 땅을 사랑하고 나무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오늘 지혜가 당신을 부른다. 광장에서, 길목에서, 당신의 문 앞에서. "나를 사랑해주세요. 내가 당신의 생명을 지킬게요." 우리가 지혜를 외면하고 탐욕을 연인 삼을 때 세상은 무너진다. 바비 인형 회사조차 2022년부터 제인 구달과 침팬지 피규어를 만들어 그녀의 지혜를 기억하고 있다. 작은 플라스틱 인형이지만, 그 인형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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