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우리의 인생 자체가 괴로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몸에 병이 없다고 해도, 부자라고 해도,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도,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괴로움의 바다 속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불설비유경》에서 부처님은 사랑하는 아내의 장례를 치른 코살라국의 파사익(Pāsenādi)왕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사람이 광야에서 사나운 코끼리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한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우물 옆에는 큰 나무가 있고, 우물 속으로 뿌리가 나 있었습니다. 그는 곧 나무 뿌리를 타고 내려가 우물 속에 몸을 숨겼습니다.
우물 사방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있어서 그를 물려고 하였고, 나무뿌리는 흰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갉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물 밑에는 무서운 용(毒龍)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용이 몹시 두려웠고, 나무뿌리가 끊어질까 걱정이었습니다.
나뭇가지에는 벌통이 달려 있어서 벌꿀이 다섯 방울씩 입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꿀의 단맛에 취하여 자신이 처한 위험을 망각했습니다. 나무가 흔들리면 벌들이 흩어져 내려와 그 사람을 쏘았지만 그는 벌에 쏘이면서도 꿀을 받아먹는 데에만 열중했습니다. 한편 들에서는 불이 일어나 그 나무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부처님은 왕에게 물었습니다. “대왕이여, 이 사람이 벌꿀의 맛을 탐할 수 있겠습니까?”
왕은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어떻게 그 조그마한 맛을 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했습니다.
광야는 무명(無明)의 어두운 인생이요, 사람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이라. 사나운 코끼리는 무상(無常)함의 비유이고, 몸을 숨긴 우물은 생사(生死)의 비유라네. 나무의 뿌리는 수명의 비유이고, 흰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이라. 네 마리의 독사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사대(四大)이니, 수명(壽命)이 다하면 독사에게 먹히리라. 떨어지는 꿀방울은 오욕락(五欲樂)이요, 아프게 쏘는 벌은 그릇된 생각(邪見)이라. 들판에 이는 불은 늙어가고 병드는 일, 우물 밑의 독한 용은 죽음이라네. 지혜로운 사람은 이것을 생각하여 생사의 우물 속을 싫어하나니 오욕락을 탐하여 즐기지 않아야 비로소 우물에서 벗어난다네. 죽음의 왕에게 쫓기면서도 무명의 바다에서 편한 듯이 지내는가
범부의 자리를 벗어나려면 소리와 빛깔을 쫓지 말지니.
우리는 무상의 코끼리에 쫓기어 생사의 우물 속에 빠져 있습니다. 부처님은 우물 속이 온통 괴로움이라는 의미에서 ‘일체는 괴로움이다(一切皆苦)’라고 했습니다. 불교의 출발점은 이러한 괴로움의 자각입니다. 괴로움을 깨닫고, 괴로움의 원인을 발견하여 이것을 없앰으로써 생사의 우물을 벗어나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