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손경락의 법률 칼럼 - ‘스타레 데키시스’

2022-05-25 (수) 손경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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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성의 낙태권을 부정하는 연방대법원 보수파 대법관 사무엘 엘리토(Samuel Alito)의 98쪽짜리 판결문 초안이 언론에 유출되어 연일 그 찬반 논쟁으로 떠들썩하다.

낙태문제는 본 칼럼에서도 ‘뜨거운 담론 낙태’(2020.2.12)에 이어 ‘다시 점화된 뜨거운 담론 낙태’(2021.9.15)를 통해 두 차례 다룬 바 있지만, 1973년 대법원의 판결 ‘로 대 웨이드’(Roe v. Wade) 사건부터 비롯된다.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임신기간을 3분할한 후 헌법상 임신 6개월까지는 임산부가 중절 수술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여성의 낙태권을 폭넓게 인정했다.

이 삼분법은 1992년 ‘플랜드 페런트후드 대 케이시’(Planned Parenthood v. Casey) 사건을 통해 태아의 생존 가능성 시험결과에 따라 융통성 있게 낙태허용 기간을 정하는 것으로 판례가 일부 대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로는 통상 임신 23~24주까지 낙태가 허용된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단임 임기 중 이례적으로 총 9명의 정원 가운데 3명씩이나 대법관이 교체됨으로써 보수파 6 대 진보파 3으로 대법원 구도가 완성되었고, 이에 맞춰 공화당 우세의 많은 주에서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중 임신 15주 이후 낙태를 금지하는 미시시피주의 법안이 이번 대법원의 심리를 받던 중 유출된 것이다.

유출된 초안에 따르면 ‘로’사건은 헌법에 근거가 없기 때문에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이 문제는 각 주에서 알아서 판단할 사항이라고 주장한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이 기조가 로버츠 대법원장을 제외한 나머지 5명 보수파 대법관들의 다수의견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엘리토의 초안을 반대하는 측은 대법원의 구성원들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영미법에서 가장 중요한 법리 중 하나인 ‘스타레 데키시스’(stare decisis), 즉 ‘선례구속의 원칙’을 무시하면 되겠느냐고 반박한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스타레 데키시스’는 이미 결정된 판례는 유사한 후속 사건에 대해 구속력을 미치고, 상급법원의 판결이 하급법원을 구속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법의 공평한 적용뿐 아니라, 법의 지속성과 예측 가능성을 위해 법치주의의 근간이 되는 법리이기도 하다.

선례구속의 원칙에서 유의할 점은 사건을 재판하는 법원의 바로 상급법원의 선례만 구속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잘 아는 수정헌법 2조에서 “국민의 무기를 소유하고 휴대할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라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국민’의 정의가 순회법원(재심 상급법원)마다 다르다.

텍사스주가 속한 제5 순회법원은, 불법체류자는 국민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고, 일리노이와 인디애나주 등이 속한 제7 순회법원은 불법체류자라 하더라도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면 상황에 따라 국민으로 볼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이런 경우, 텍사스의 하급법원은 제5 순회법원의 선례를, 일리노이주에 위치한 하급법원은 제7 순회법원의 선례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뉴욕주가 속한 제2 순회법원처럼 이런 판례가 아직 정립되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이때는 판사가 재량껏 다른 주의 판례를 참작, 결정하게 된다. 물론 ‘로’사건처럼 대법원에서 결정하면 연방과 주 법원 할 것없이 미국의 모든 법원은 이를 따라야 한다.

드물지만 세월의 경과에 따라 선례가 뒤집히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선례에 결정적 흠결이 있거나 사회적·법적 상황이 바뀐 경우, 선례에서 제시한 해결책이 거의 실행 불능이거나 선례가 부당한 결과를 초래한 경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번 초안을 살펴볼 때 판례가 뒤집힐 가능성이 농후한데 그렇다면 ‘스타레 데키시스’를 어떤 식으로 해석, 인용해서 새 판결문을 내놓을지 사뭇 궁금하다.

<손경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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