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제가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근무하다가 그 당시 기자생활이 생리에 맞지 않는다며 일찍 그만두고 ‘해심(海心)’이란 이색 주점 대폿집을 차리자 김형께서 자주 찾아주셨지요.
삼가 김 형 영전에 ‘너가 나다’를 바칩니다.
“어느 날 너는 내게 물으리라./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내 삶인지 아니면 네 삶인지? 내 삶이라 대답하면/ 너는 떠나갈 것이리/ 네가 내 삶인 줄 모른 채 “-칼릴 지브란
법률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불행천만 유감스럽게도 법률 때문에 해마다 피해 보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통계 숫자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무지와 히스테리, 정치적인 건초(乾草) 만들기로 인해 서적에 탑재(搭載)된 시대착오적인 법률, 반(反) 생명 법률, 편파적인 법률, 현실은 고정되고 자연은 한정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법률 말이다.
카프카 소설 ‘심판’의 주인공은 자기가 무슨 죄목으로 또 왜 심판을 받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아는 유일한 ‘죄’는 그 언제나 그 어떤 상황에서나 모든 죄의 본질, 곧 ‘약자’라는 거다.
1991년 5월 나는 다음과 같은 공개서한을 고국의 하늘 김지하 형에게 띄웠었다.
우생(愚生)은 김형과 같은 서울대학교 문리대 동문으로 김형이 입학하던 해인 1959년 졸업했지요. 그 후 1970년 초 사상계(思想界) 부완혁 발행인의 요청을 받고 부완혁 선생의 표현을 그대로 쓴다면 ‘무보수 게릴라 편집장’ 일을 그 당시 몸을 담고 있던 회사 일로 일본 출장을 다녀온 후부터 보기로 했었지요. 일본에 있는 동안 김형의 장편 담시(譚詩) ‘오적(五賊)’이 사상계 5월호에 실려 김형은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되었고 사상계는 폐간되고 말았지요.
그 후 1972년 초 직장 때문에 영국에 가 있으면서 나는 김형이 발표한 또 다른 장편 담시 ‘비어(蜚語)’로 다시 체포되어 마산 결핵 요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풍문에 들었지요.
이렇게 70년대 옥중에 있던 김형을 위하고 키웠다는 단체가 지난 1991년 5월 9일 김형을 제명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나는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로 출발, 현재 회원 500여 명의 참여문학단체로 자랐다는 ‘민족문학작가회의’란 이름부터가 내게는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
자고로 알찬 내용이 없을 때일수록 요란하게 형식을 찾고 거창한 간판을 내걸며 실제로 행동하는 실생활 삶 대신 말로만 글로만 때워 버리지 않던가요. 목소리가 크고 이론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실행과 실천이 없다는 반증(反證) 아닙니까. 제명이다 파문이다 하는 것이 어째 중세 암흑시대를 연상케 하고 마치 북한의 김일성교(敎)나 남한의 박정희교(敎)에서 하던 짓거리 같군요.
문제는 이 세상의 모든 폭군을 몰아내기 전에 우리 각자 가슴과 머릿속에 있는 폭군부터 몰아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의 말마따나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며, 조만간 다 숨져 사라질 덧없는 목숨끼리 더 좀 선의(善意)와 호의(好意)로 서로를 대하면서 아름다운 삶과 사랑을 잠시나마 우리 서로 나누어 보자는 뜻에서입니다. 한 사람의 독자 입장에서 망언다사(妄言多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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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상/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