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무진등(無盡燈)] 왕자와 우주선장

2021-10-28 (목) 01:07:05 동진 스님 (SAC 영화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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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유명한 우주영화 스타트랙 주인공이었던 샤트너 배우가 그 상징성 때문인지, 베조스에게 초청받아, 우주를 비행하고 왔다. 이에 대해 영국의 윌리엄 왕자가 특별히 자신의 의견을 제기해 대중의 관심이 쏠렸다. 윌리엄 왕자는 우주선의 탄소 배출 문제에 의문이 있다며, 지금은 억만장자들이 새로운 곳을 찾을 게 아니라, 지구를 지킬 때라고 했다. 이에 대해 이것은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라며, 우주 개발을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고, 샤트너는 반박했다. 왕자와 우주선장이라니, 그 호칭으로 인해 어쩐지 현실감 떨어지지만, 그러나 그 이름만으로도 이 이슈의 주제가 그대로 드러나는 듯하다. 한쪽은 동화 같고 한쪽은 만화 같다. 혹은 보수거나 진보이다. 굳이 프랑스 역사까지 올라갈 필요없이, 어떤 이슈가 등장할 때, 세상은 늘 진보와 보수의 개념으로 갈라진다. 요즘은 진보와 보수가 정치용으로 기운 경향이 있지만, 보수와 진보가 없인 세상이 군형있게 나아갈 수 없다. 그러나 늘 말하지만 정답은 없다. 왜냐하면 보수라고 진보라고 할 만한 그 뚜렷한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손바닥과 손등처럼, 비록 존재하기는 하나, 손을 반으로 잘라, 여기까지는 바닥, 등, 이라고 정의할 수 없듯이, 진보 보수도 그렇기 때문이다. 예전에 진보와 보수를 다룬 글 중에서, '우리나라의 진보를 한 줄로 세워 가다 보면, 바다를 건너 미국을 지나고, 동으로 달려오는 영국을 만나게 될 것이다' 라는 글귀를 대한 기억이 있다. 당시 이 글은 큰 울림이었다. 얼마나 나는 소우주적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에 대한 각성이 왔었다. 세상엔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존재하지만, 그 경계는 늘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어서, 통으로 세상을 보는 입장에서는 시비를 가리는 자체가, 그 이슈가 아무리 중요해도, 좀 우습다. 우습다, 라기 보단, 현명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쪽이 맞겠다. 암튼, 그래서 불교에서는 시비를 않는다. 세상엔 진보와 보수도 있고 우파 좌파가 있으며 고저광협장단이 있다. 하지만 그 경계는 늘 맞닿아 있다. 짧은 게 없다면 누가 긴 것을 논할 수 있겠는가. 현명한 삶은 그 경계를 늘 잊지 않고 사는 것이다. 너도 옳고 다 옳다 같은 그런 흐릿한 자세가 아니다. 정점, 과녘을 꿰뚫어 언제 어디서나 가장 진리에 가까운 답을 얻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세상에선 우주냐 지구냐 그런 한쪽의 의견에 설 수 없다. 지구편을 들려면 지구 환경, 나라마다의 속성, 기후의 변화, 지리적 여건, 인구의 발달과 역학관계...모두 알아야 하고, 우주를 논하려면 하다못해 나사 정도라도 꿰뚫고 있어야 할텐데, 별 하나도 제대로 모르는데, 그 정점을 어찌 알겠는가. 당연히 모르면서도 각자가 자기가 생각한 거, 자기가 좋은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정답이 없으니, 결국 다수의 논리로 가게 되고, 그건 누누이 말하지만 흐름이지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환경보호 얘기가 나오면, 발전 얘기가 나오는 건 늘 있는 일이고, 그 밸런스는 현재, 여기, 사는 우리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알고 하든, 아니든, 스스로 결정하며 살고 있다. 우주선이 옳다 여겨지면 시비 이전에 타면 되는 것이고, 지구 환경 문제가 우주개발과 연관이 있다면, 안 타고 환경을 위해 무언가 하고 있으면 된다. 이것은 각자의 세상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깊은 계곡에서 모닥불 피우며, 눈내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이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비싼 저녁을 먹는 것이 행복한 이의 세상은 옳고 그름, 혹은 고저장단으로 판단할 수 없다. 우주여행이 여론의 관심을 얻어 대중화 될 날도 있겠지만, 지구를 푸르게 만들고 공해를 줄여, 젊은 초록별로 다시 만들 날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건 세상이 변화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 속에는 늘, 새로운 이슈들이 등장하고, 서로 싸우고 보충하고 물어뜯고, 피흘리고 화해하며,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다. 삶은 늘 그렇게 치열한 것이다. 치열하지 않은 생은 없다. 진정한 불자는 그 시끄럽고 혼란스럽고 치열한 세상을 살면서도, 마치 불꽃 속의 연꽃처럼, 고요히 살아가는 것이다.

<동진 스님 (SAC 영화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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