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일평생 선교에 몸 바친 최찬영 선교사 별세

2021-10-26 (화) 준 최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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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첫 한국 선교사로 태국 사찰 성경 보내기

▶ 인도에 만화 성경 보급, 중국 성경 인쇄소 건립…“나를 위해 기도해 준 모든 사람께 감사” 마지막 말

일평생 선교에 몸 바친 최찬영 선교사 별세

최찬영 선교사(오른쪽)가 생전 아내 김광명 여사(가운데)와 선 미니스트리의 김정한 선교사와 함께 찍은 사진. [김정한 선교사 제공]

“선교란 모든 사람의 입으로 주를 시인토록 하는 것”. 지난 20일 96세의 나이로 별세한 최찬영 선교사가 처음부터 선교에 뜻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최 선교사는 한국 전쟁 직후인 1955년 풀러 신학교 장학생 자격으로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아내 김광명 여사(2017년 작고)도 LA 카이저 메모리얼 병원으로부터 수련의 제의를 받아 놓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선교부 관계자가 찾아왔다. 해방 후 처음으로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려고 하는데 최 선교사가 혹시 태국 선교에 뜻이 있는지 물어왔다. 내일까지 답변을 해달라며 떠나는 관계자를 바라보는 부부는 난감하기만 했다.

“선교의 길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공부하는 길은 다시 열릴 수 있지만 주님이 부르시는 선교사의 길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이 아닌가. 나는 덤으로 살아왔는데 주님이 부르신다는데 어찌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국민일보 인터뷰). 이후 평생 동안 ‘해방 후 첫 한국 선교사’란 타이틀이 따라붙게 된 순간이다.

당시는 태국으로 직접 연결되는 항공편이 없던 시절이었다. 우선 비행기로 홍콩에 도착한 뒤 방콕까지 배를 타고 들어갔다. 당시 아내는 임신한 상태였다. 태국에서 부부가 거처할 곳은 종탑 바로 아랫방이었고 부부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징그럽게 생긴 도마뱀들이었다. 코 큰 서양 선교사를 기대했던 태국 현지인들은 태국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며 멸시 섞인 태도로 대하기 일쑤였다.


최 선교사는 방콕에서 가장 크다는 제2교회의 목사직을 맡으며 본격적인 태국 선교를 시작하게 됐다. 약 3년간의 태국 목회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미국에서 첫 안식년을 보낼 때였다. 어느 날 미국성서공회 연합회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태국 성서공회 총무로 적합한 아시안 선교사를 찾고 있는데 추천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면서 4명 후보의 이름을 들이밀었고 최 선교사는 이중 2명을 추천했다.

그런데 성서공회 관계자는 마치 최 선교사를 이미 점 찍어 놓았다는 듯 총무직을 맡아 달라고 제의했다. 성서공회가 하는 문서 선교는 생각해 본 적 없던 최 선교사는 별다른 답변 없이 안식년을 보내고 있었다. 한 달 반쯤 지났을 무렵 결혼식 주례를 맡았던 한경직 목사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문서 선교도 중요한 사역이니 태국 성서공회 총무직을 한번 맡아보면 어떻겠냐는 권유였다.

한경직 목사의 권유와 아내의 격려 끝에 최 선교사는 결국 제2의 선교 사역을 위해 태국으로 다시 향했다. 태국 성서공회 총무를 맡으며 최 선교사의 선교 사역은 본격적으로 무르익어갔다. 최 선교사는 불교 국가인 태국에서 어떻게 하면 수십만 명의 스님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라는 ‘역발상’ 선교 전략을 세웠다. 각 불교 사찰에 성경 보내기 운동을 시작했고 뜻밖에도 태국 불교계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읽히는 성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성경 녹음테이프 사역을 전개했고 ‘읽기 쉬운 성경’이란 아이디어로 아시아 각 언어로 펴낸 만화 성경은 인도에서만 수백만 권이 팔려 나갔다. 중국인에게 성경을 보급하겠다는 의지로 최 선교사는 1986년 중국 남경에 애덕 성경 인쇄소를 건립을 추진했다. 애덕 인쇄소를 통해 중국어와 세계 각국 언어로 인쇄된 성경은 2억권이 넘는다.

최 선교사는 92년 66세의 나이로 은퇴를 결심했다. 그러나 말만 은퇴지 사실상 선교사로서의 제2의 인생이 시작하게 된다. 자녀가 있는 LA로 돌아온 최 선교사는 풀러 신학교로부터 교수직을 제의받았다. 태국 선교를 위해 포기했던 유학의 꿈이 약 40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최 선교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시기에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풀러 신학대학원에서 한국학부 창설한 최 선교사는 5년간 연봉 1달러만 받으며 신학생과 후임 선교사 양성에 힘썼다.

2009년 LA 또감사선교교회를 통해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은 최 선교사는 전 세계에서 활동 중인 후배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사역을 이어갔고 2017년부터는 LA를 중심으로 은퇴 이후 삶을 선교에 바치는 ‘황금기 선교사 운동’을 펼쳤다. 최 선교사는 황금기 선교사 운동을 통해 지난해까지 100여 명의 황금기 선교사를 임명하는 등 눈을 감을 때까지도 선교의 끈을 놓지 않는 열정을 보였다.

최 선교사의 제자로 황금기 선교사 운동을 함께 펼쳐온 김정한 선교사는 “올해 6월까지도 황금기 선교사를 임명하는 등 선교 활동에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었다”라며 “돌아 가시기 전날 전화기 넘어 희미한 음성으로 ‘나를 위해 기도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셨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준 최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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