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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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담긴 병’의 탄생…통조림은 전쟁의 산물

2021-09-29 (수) 이용재 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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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재의 식사 - 나폴레옹 전쟁과 병조림, 통조림의 탄생

1865년 1월, 미국 오마하주 네브라스카 북쪽의 미주리강에서 증기선 버트랜드호가 침몰했다. 그리고 100년도 더 지난 1968년 인양 작업이 시작됐다. 덕분에 화물 절반 이상을 발굴할 수 있었으니, 버트랜드호는 졸지에 당시의 문화 및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타임캡슐 노릇을 했다. 그런 가운데 가장 값진 발견은 바로 통조림이었다. 1974년 브랜디에 절인 복숭아, 굴, 토마토, 꿀, 그리고 모둠 채소 등의 통조림이 발견된 것이다. 전미 식품보존협회의 시험 결과 모양새나 냄새는 가공 당시와 비교하면 나빠졌고 비타민 함유량도 떨어졌지만 부패, 즉 미생물 번식의 흔적은 없었다. 따라서 먹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났다. 식품이 무려 109년이나 안전하게 보관되다니, 통조림이 등장한 지 160여 년 만의 쾌거였다.

통조림의 출발은 병조림이었다. 인류는 전쟁을 과학과 기술의 비약적 발전의 계기 및 기회로 삼아왔으니, 병조림 또한 그 산물 가운데 하나였다. 건조나 염장, 훈제 등 인류가 오랜 세월 유지해온 식품 보존법이 18세기 말에 이르자 일종의 한계에 부딪힌다.

사실 지금까지도 인류를 잘 보필해 오고는 있지만 맛의 차원에선 열등했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 식품 보존법은 수분의 대부분을 제거하는(건조) 등, 극단적 여건을 조성해 부패의 원인인 미생물의 발생을 미연에 원천 봉쇄하는 원리였다. 따라서 너나 할 것 없이 바짝 말라 있는 데다가 단백질의 경우 매우 짰다.


결국 전통적 방식으로 보존된 식품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요기만 할 수 있는 비상 식량의 노릇밖에 하지 못했다. 전쟁에서 병사들이 잘 싸우려면 잘 먹어야 했고, 그러려면 음식이 최대한 비(非)전시의 일상과 가까워야만 했다. 일정 수준의 수분 및 신선함을 갖춘 음식 말이다.

그리하여 1795년 프랑스 정부, 좀 더 정확하게는 나폴레옹이 설립한 ‘프랑스 산업 장려협회’가 팔을 걷어붙였다. 당시 프랑스는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등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니, 여름과 가을이면 식량 부족으로 인해 군의 작전 수행 능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이처럼 사기와 직결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1만2,000프랑(현 시세로 약 5,700만 원)을 상금으로 내걸고 경제적 식품 장기 보존법을 현상 공모했다.

“프랑스의 군사적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과학적이거나 공업적인 처리법을 발견하거나, 혹은 그런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프랑스 산업장려협회에서 1만2,000프랑을 상금으로 지급한다.” 조건은 단 한 가지, 방부제 무첨가였다.

당시로서는 만만치 않은 과제에 샴페인으로 유명한 샹파뉴 지방의 셰프였던 니콜라 아페르(1749~1841)가 도전한다. 귀족들을 위한 셰프로 일했던 그는 병조림의 아이디어를 고안해낸다. 샴페인 유리병에 잘게 썬 양배추, 당근 등을 담고 코르크 마개를 느슨하게 막은 뒤 끓는 물에 30~60분간 가열한다. 마지막으로 뜨거울 때 코르크 마개를 촛농으로 밀봉한다.

초기 실험 결과에 고무된 아페르는 연구소 겸 공장을 차렸고, 샴페인병은 곧 주둥이가 넓은 유리 단지로 교체됐다. 1803년 채소, 과일, 고기, 생선, 유제품 등 필수 식품의 병조림이 프랑스 해군과 함께 시험 항해에 나서기 시작했다.

1804년 아페르는 통조림의 제작에도 착수한다. 양철 통조림에 고기를 담고 납땜으로 밀봉한 뒤 몇 달 동안 보관한다. 깡통이 부풀어 오르지 않으면 섭취나 장기보관에 안전한 것으로 간주했다. 결국 1810년 아페르는 1만2,000프랑의 상금을 받는 한편, 연구 결과를 모아 ‘고기와 채소 장기 보관법’을 출판한다. 당시 6,000부가 출간된 ‘장기 보관법’은 최초의 현대 식품 보존 관련 서적이었다.


아페르의 발견은 식품의 부패가 미생물 탓임을 밝혀낸 루이 파스퇴르(1822~1895)의 연구를 50년이나 앞서는 쾌거였다. 병조림 덕분에 소규모 분할 병력을 빠른 행군으로 이동시키는 나폴레옹의 전술이 한층 더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병이다 보니 쉽게 깨질 수는 있었지만, 그 정도의 단점은 보완된 기동력 및 사기에 비하면 무시할 만했다. 1809년 ‘쿠리에 드 뢰로프’지는 병조림에 대해 “아페르는 계절을 붙잡아두는 방법을 발명했다. 정원사가 악천후의 계절을 견디기 위해 유리돔 아래에 연약한 식물을 보호하듯, 아페르는 병 안에 봄과 여름과 가을을 살아있게 만들었다”라고 보도했다.

한편 통조림은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1810년, 역시 프랑스인인 필립 드 기라르가 통조림의 원천 기술을 개발한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듯 깡통에 음식을 담아 밀봉하는 바로 그 보존법이었다. 기라르는 영국으로 건너가 피터 듀란드와 함께 특허를 등록하지만 본격적인 상업화는 시도하지 않고 특허를 브라이언 돈킨과 존 홀에게 판다. 그리하여 1812년 템스강 우측 버몬드 지구에 세계 최초의 통조림 공장이 문을 열었다.

돈킨과 홀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통조림의 대량 생산을 추진했지만 과정이 원활하지는 않았다. 백철 깡통을 하나씩 손으로 제작 및 밀봉해야 할 뿐만 아니라 조리가 6시간이나 걸려, 대중을 대상으로 유통시키기에는 단가가 너무 높았다.

따라서 돈킨과 홀의 통조림은 영국 육군과 공군이 주 고객이었으며, 윌리엄 에드워드 페리 경(1829), 존 프랭클린 경(1857) 등의 남극 탐험에도 식량으로 채택됐다. 1939년 초창기의 통조림을 개봉했는데 먹는 데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다만 식품 안전 검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이처럼 초창기 용접으로 완성시켰던 통조림 깡통이 좀 더 위생적인 방식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건 1904년이다. 미국의 맥스 암스(Max Ams)사가 1888년 개발했으나 대량 생산에 적용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종전의 통조림이 뚜껑까지 납땜으로 밀봉시켜야만 했다면, 새로운 깡통은 각각 세 겹과 두 겹의 재질로 된 벽면과 뚜껑이 이중의 이음매(double seam)를 이루며 서로 맞물려 여며지는 방식이었다. 1966년 측면 용접 기술이 도입될 때까지 이중 이음매 밀봉 방식은 통조림 역사상 최선의 혁신이었다.

통조림이 계속 발전하는 데 비해 적절한 깡통 따개는 신기하리만치 개발이 늦었다. 1824년 윌리엄 에드워드 페리 경은 북대서양 항로 탐사에 구운 송아지고기 통조림을 비상 식량으로 챙겨갔다.

깡통에는 “가위나 끌로 윗부분을 둥글게 오려낸 다음 여시오”라는 안내 문구가 쓰여 있었다. 전쟁에서는 대검으로 뜯던 방식이 그대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오늘날에도 쓰이는, 통조림 주위를 굴러가는 바퀴가 달린 따개는 1870년이나 돼서야 미국의 헨리 라이먼이 발명했다. 이후 90년이 지난 1959년, 역시 미국의 발명가인 에르멀 클레온 프레이즈가 뚜껑 일체형의 통조림 깡통을 발명했다. 바로 오늘날 참치 통조림에 쓰이는 원터치 캔이다.

또 한 차례의 전쟁이 통조림의 세계를 발전시켰다. 1차 세계대전이었는데 이번에는 기술보다 내용물에 더 초점이 맞춰졌다. 참호전이었던 1차 대전의 특성상 안전하게 수송이 가능한 통조림의 수요가 대폭발했다. 전쟁 초기에는 ‘불리 비프(Bully Beef, 콘비프의 일종)’, 돼지고기와 콩, 소시지 등 값싸고 열량 높은 식품 위주였다. 그러다가 1916년에 이르러 수준 낮은 싸구려 식품이 전장의 사기를 저하시키자 개선의 움직임이 일었고, 궁극적으로 완결된 끼니가 담긴 통조림이 등장하게 됐다.

1917년 프랑스는 코코뱅(닭고기 와인 스튜), 뵈프 부르기뇽(쇠고기 와인 스튜), 프렌치 어니언 수프, 비시슈와즈(차가운 감자 수프) 등을 통조림으로 내놓았다. 한편 이탈리아도 이에 질세라 라비올리, 볼로네제 소스의 스파게티, 미네스트로네(채소 수프) 등을 실험적으로 선보였다. 이처럼 전쟁을 발판 삼아 진일보한 통조림의 지평은 종전과 동시에 민간의 세계로 유입돼 식품 문화를 발전시켰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통조림 햄인 스팸이 입지를 확고하게 다졌다. 스팸은 1937년, 미국의 육가공 업체 호멜사에서 인기 없는 부위인 돼지 목심을 소모하기 위한 방편으로 개발했다. 호멜사는 당시 100달러의 상금을 걸고 사내 공모를 받아 이름을 지었고, 진짜 의미는 당시의 임원 몇몇만 알고 있는 일종의 대외비라 주장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양념한 햄(Spiced Ham)’의 줄임말이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통한다. 이런 스팸이 2차 세계대전에서 신선육의 대체품으로 군에 보급되었으며, 전쟁의 지속과 맞물려 미군의 주둔지였던 하와이와 괌, 오키나와 등지에 중요한 식료품으로 자리를 잡은 한편 지역의 음식 문화에 흡수되었다. 스팸을 밥 위에 얹거나 사이에 끼워 김으로 싼 하와이의 대표 음식 ‘무스비’가 현지화된 스팸의 대표적 예다.

<이용재 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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