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프렌치 셰프가 만드는 돼지국밥… 익숙한데 새롭고, 낯선데 세련됐다

2026-01-07 (수) 12:00:00 장준우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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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우가 만난 셰프들

▶ 백랑 신민섭 셰프

'익숙한 맛일수록 어렵다'는 말은 외식업계의 불문율 중 하나다. 친숙한 메뉴일수록 대중의 머릿속에 저마다 완성된 정답이 존재하기에 변주를 주기 까다롭기 때문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잠시 이목을 끌 수 있지만, 메뉴가 가진 정형성을 벗어나는 순간 대중은 낯섦을 이유로 쉽게 등을 돌린다. 한때 서울에 돼지국밥 붐이 일며 수많은 식당이 생겨났지만, 몇몇 곳을 제외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것도 이를 방증한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 뒷골목에 위치한 흑돼지국밥집 '백랑'의 신민섭(43) 셰프는 이 견고한 장벽 앞에서 정면 돌파 대신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의 정교한 접점을 찾아냈다. 깊은 육향을 내는 난축맛돈 흑돼지 육수와 사골 육수를 섞은 뽀얀 국물, 저온에서 부드럽게 익혀 프랑스 잠봉(Jambon)을 연상케 하는 분홍빛 고명, 페스토 형태의 부추 양념장과 유자 새우젓까지. 각각의 요소는 낯설지 몰라도, 그 합은 절묘하게 어우러져 익숙하면서도 세련된 맛을 완성한다.

■ 안정적 삶 마다하고 택한 요리사의 길

"새로우면서도 익숙하다는 말이 모순적이지만, 국밥 한 그릇에 그 아이디어를 담고 싶었습니다. 요리사의 개성과 대중성이 반드시 양립할 수 없는 가치는 아니니까요."


신 셰프는 프렌치 캐주얼 식당 '루블랑'의 오너 셰프이기도 하다. 프렌치 셰프의 국밥이라 하면 으레 뻔한 퓨전의 조합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는 다행히 그 낭떠러지 같은 선택을 피했다. 대신 지난 10여 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경험의 총합을 한 그릇에 정교하게 배치하는 길을 택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그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KT에서 근무하며 안정적인 삶을 살던 그에게 요리는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유일한 해방구였다.

"요즘 같으면 유튜브로 쉽게 배웠겠지만, 그때는 정보를 얻기 어려웠죠. 제대로 배우고 싶어 혼자 공부를 시작했고, 주말마다 요리 클래스를 전전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회사를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었죠."

주말마다 여러 요리 클래스를 전전하다 진지하게 요리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 계기는 숙명여대 '르꼬르동블루' 프랑스 요리 과정을 들으면서부터였다. 때마침 조직 내에서 심한 커리어 변동을 겪으며 시련을 맞았던 그는 결국 2013년 퇴사를 결심하고 홍대 골목에 '루블랑'을 열었다. 수제 맥주와 프렌치 요리의 결합으로 나름의 반향을 일으켰다.

■ 양식에 대한 아쉬움 채워준 건 '일상식' 돼지국밥

신 셰프는 7년 가까운 운영 기간 동안 외식업의 생태계를 냉철하게 관찰하며 사업가로서의 정체성을 다듬어 나갔다. 맥주라는 강렬한 개성의 술이 정교한 요리의 섬세함을 가리는 한계를 목격했고, 트렌드에 민감한 양식당이 가진 매출의 불확실성을 체감했다.

"레스토랑은 특별한 날을 위한 이벤트 성격이 강해 매출이 시즌이나 경기에 따라 들쑥날쑥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매일 찾아도 질리지 않는 일상식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죠."


팬데믹 시기 매장을 용산으로 이전하며 생긴 빈 공간은 그에게 기회가 됐다. 8개월간 월세를 내면서도 비워둘 정도로 신중하게 고민한 끝에 낙점한 아이템은 돼지국밥이었다. 흔하지만 그렇기에 셰프의 터치로 개선할 여지가 가장 많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서울에는 맑은 돼지 곰탕류가 주류였는데 유행에 편승하고 싶진 않았죠. 여러 국밥집을 벤치마킹하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건 고기였어요. 부위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거칠게 삶아낸 게 늘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그는 고기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돼지국밥을 만들기 위해 제주 흑돼지 하이브리드 품종인 난축맛돈을 선택했다. 루블랑 시절부터 소시지를 만들고 스테이크를 구우며 가장 잘 이해하게 된 식재료였다. 일반 백돈보다 육향이 강하고 근내 지방이 고루 퍼져 있는 난축맛돈의 풍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수비드 기법의 원리를 응용했다.

"고기 국물은 보통 85도 이상에서 삶아야 지방과 감칠맛이 충분히 우러나오는데 고기의 단백질은 75도만 넘어도 식감이 퍼석해집니다. 저온에서 장시간 열을 가해서 단백질을 부드럽게 변형시키는 게 수비드 원리잖아요. 온도와 시간을 바꿔가며 실험해본 끝에 75도 이하에서 14시간 동안 익히면 고기도 원하는 질감으로 나오고 육수도 이상적으로 뽑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죠."

백랑은 시판 육수를 쓰지 않고 모든 과정을 직접 수행한다. 120리터 용량의 솥에 난축맛돈의 앞다리와 뒷다리살을 통째로 넣고 향신채와 허브를 곁들여 천천히 익힌다. 여기에 소와 돼지의 사골을 진하게 끓여 소량 배합함으로써 국물의 깊이를 완성한다.

신 셰프는 국내뿐 아니라 일본 라멘 성지들을 돌며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손님이 국밥을 대하는 순서를 설계했다. 한 그릇 안에서 여러 맛의 층위를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적절한 염도로 낸 국물 본연의 맛을 오롯이 즐긴다.

이후 유자 새우젓을 넣으면 일본의 유즈코쇼처럼 산뜻한 시트러스 향이 국물의 기름진 맛을 깔끔하게 반전시킨다. 마지막은 부추 페스토다. 흔한 부추무침 대신 부추를 곱게 갈아 페스토 형태로 만들어 녹여내면 국밥은 마치 수프와 같은 깊은 풍미를 머금는다. 재미는 있되 결코 선을 넘지 않는 변주다.

"국밥이라는 본질을 흩트리지 않으면서 감각의 범위를 하나씩 넓히는 것이 핵심입니다. 매일 와도 매번 다른 조합으로 먹는다면 늘 새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세심함은 공간에서도 이어진다. 일식당 같은 정갈한 나무 인테리어와 고급스러운 기물은 국밥을 '빨리 해치우는 한 끼'에서 '정중하게 대접받는 요리'로 격상시킨다. 덕분에 이곳은 국밥집 특유의 냄새와 투박함을 꺼리던 젊은 여성 고객들이 혼자서도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남성보다 여성 고객의 방문율이 더 높은 이례적인 국밥집이 탄생한 배경이다.

신 셰프는 바로 옆 루블랑에서 저녁엔 프렌치 요리를 선보이는 한편, 낮엔 백랑에서 일정한 컨디션의 국물을 뽑아내는 루틴 속에서 큰 즐거움을 얻고 있다.

"매일 똑같은 음식을 만들면 쉽게 질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뚝딱뚝딱 나가는 그릇들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스트레스가 풀려요. 프렌치 요리도 재미있지만 결국 나이가 더 들고 둘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고 하면 국밥을 끓이고 있을 것 같달까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는 일은 쉽지 않지만 일상을 맛으로 채우려는 대중들에게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백랑의 국밥 한 그릇은 신 셰프가 인생을 통해 내린 대답이다.

<장준우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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