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지금은 단골이 된 와인 가게에서 안내 문자를 받았다. 라벨이 손상된 와인을 모아 할인 판매를 한다고 했다. 그중에 샤토 오브리옹(Chteau Haut-Brion) 한 병이 있었다. 반값 이하 가격에 나온 터라 애초에 필자의 몫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행운은‘선무당’에게 돌아왔다. 샤토 오브리옹은 프랑스 보르도 그랑크뤼클라세 1등급 와인이다. 61개 그랑크뤼클라세 와인 가운데 역사가 가장 오래됐다. 보르도 와인을 상징하는‘샤토’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그야말로 원조 샤토에서 생산한다.
■세컨드 와인까지 구분
그랑크뤼클라세 와인을 생산하는 샤토에서는 대부분 세컨드 와인도 만든다. 와이너리를 대표하는 와인, 그랑뱅(Grand Vin)을 만드는 포도밭과는 다른 밭에서 수확한 포도나 어린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 주로 만든다.
그랑뱅용으로 만든 와인 가운데 품질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판단되는 것도 세컨드 와인이 된다. 이 세컨드 와인의 개념 또한 샤토 오브리옹에서 처음 도입했다. 물론 최초로 출시한 곳은 따로 있지만 말이다. 1874년 샤토 피숑-롱그빌 콩테스 드 라랑드(Chteau Pichon-Longueville Comtesse de Lalande)가 세컨드 와인으로 레제르브 드 라 콩테스(Rserve de la Comtesse)를 처음 출시했다.
재미있게도 60개 샤토가 모두 메독 지역에 있는데, 오직 오브리옹만 보르도시가 자리한 그라브의 북부, 페삭레오냥(Pessac-Lognan)에 있다. 다음에 다루겠지만, 샤토 오브리옹이 최고급 와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때에도 메독 지역은 아직 와인의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다. 습지였던 메독 지역은 그제야 물을 빼고 간척 중이었기 때문이다.
■신부가 혼수로 가져온 포도밭에서 출발한 ‘최고급 와인’
오브리옹에서는 로마 시대부터 포도를 재배한 듯하다. 다만 기록을 바탕으로 보자면 1436년에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그 이래로 오늘날 오브리옹의 이름에 걸맞은 역사는 1533년 장 드 퐁탁이 오브리옹의 영주가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장 드 퐁탁은 1525년 리부른 시장의 딸과 결혼했다. 신부는 잔 드 벨롱. 그녀는 오브리옹 영지 부근의 포도밭을 결혼 지참금으로 가지고 왔다. 장 드 퐁탁은 일찍이 보르도항을 통해 와인, 정향, 설탕 등을 팔아 큰돈을 번 바, 상인 특유의 ‘촉’이랄까, 신부가 혼수로 가져온 포도밭의 가치를 금세 알아차렸다.
그는 오브리옹 영지마저 손안에 넣고 싶었다. 그런데 그가 주춤하는 사이 바스크 출신 상인 장 뒤알드가 오브리옹 영지를 매입해버렸다. 퐁탁은 뒤늦게 뒤알드를 찾아가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하고 작위와 영지를 몽땅 매입했다.
퐁탁은 영주가 되자마자 샤토를 지었다. 그는 영지 주위의 소작지들을 차례로 사 들여 포도밭을 늘려나갔다. 그가 101세에 생을 마감할 즈음엔 손주인 아르노 드 퐁탁 3세가 오브리옹의 상속자가 됐다.
아르노 드 퐁탁 3세가 샤토를 이어받은 1649년, 바다 건너 영국에서 청교도혁명이 일어났다. 찰스 1세가 처형되면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됐다. 크롬웰이 집권하던 이 시기는 보르도 와인 상인들에게는 암흑시대였다. 청교도 정책을 편 탓에 영국으로의 와인 수출량이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잠시 17세기 와인 유통 과정을 살펴보자. 당시에는 중간 상인인 네고시앙이 와인 생산자가 만든 와인을 오크통째 매입해 블렌딩한 뒤 자신들의 상표를 붙여 유통했다. 맛과 색이 연한 와인에 진한 와인을 섞었고, 알코올 도수가 낮거나 오래 보존해야 하는 와인에 브랜디를 섞는가 하면, 서로 다른 품질의 와인을 섞기도 했다.
심지어 와인에 여러 첨가물을 넣기도 했다. 이렇듯 네고시앙이 와인을 블렌딩하다 보니 생산자가 아무리 와인을 잘 만들어도 와인 품질을 담보할 수 없었다.
아르노 3세는 네고시앙의 이런 관행을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포도밭이 특별함을, 자신의 와인이 뛰어남을 알았기에 고심 끝에 가격을 두세 배 높여 네고시앙에게 팔았다. 그러자 네고시앙들은 아르노 3세의 와인을 다른 와인과 섞지 않았고 최고급 와인으로 따로 팔았다. 아르노 3세가 샤토 오브리옹의 가치를 올려놓은 것이다.
■영국 왕실 식탁에 오르다
한편 1658년 영국에서 크롬웰이 병으로 사망한다. 1660년에는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며 왕정이 복고된다. 이때 찰스 2세의 식탁에는 최고급 와인 반열에 오른 ‘샤토 오브리옹’이 올랐다. 영국 왕실에서는 그 한 해 동안 많은 양의 오브리옹을 주문했다고 한다.
사실 아르노 3세는 크롬웰 정부 시기 상황을 주시하면서 영국 진출을 준비해왔다. 왕정이 복고되면 화려한 궁정 문화가 되살아날 테고, 음주에 엄격한 청교도 교리에서도 벗어날 터였다. 그러면 고급 와인의 수요가 느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또한 영국 상류층의 입맛도 점차 변해, 가벼운 보르도 클라레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와인을 찾을 것이라 예상했다.
이를 위해 아르노 3세는 새로운 농사법과 양조법을 연구했다. 그는 책을 좋아해 프랑스에서 가장 큰 개인 도서관을 갖추었을 정도였다. 시설에도 아낌없이 투자해 샤토의 규모를 늘렸다. 이뿐이 아니었다.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에 최신 과학기술도 도입했다.
그는 포도가 익기 전 포도송이를 솎아내는 방식으로 포도에 향미를 집중시켰다. 수확한 포도는 잘 익은 것만 선별했다. 포도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프리런 주스와 압착해 얻은 프레스 주스를 적절히 섞었다. 껍질을 주스와 더 오랜 시간 접촉시켜 색과 타닌과 아로마를 추출했다. 여러 번 따라내기를 하여 가라앉은 찌꺼기는 제거하고 맑은 와인만 걸러 오크통에 담아 숙성했다. 오크통 숙성 중 증발하는 양을 보충(토핑)하여 와인과 공기 접촉을 최대한 막아 와인 산화를 방지했다.
이렇듯 숱한 연구와 노력 끝에 아르노 3세는 색이 진하고 향미가 복합적이며 구조감이 탄탄한 ‘뉴 프렌치 클라레’를 탄생시켰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와인을 품질별로 분리했다. 특급 포도밭 와인은 ‘오브리옹’ 또는 그의 가문 이름인 ‘퐁탁’이라 칭했다. 질이 떨어지는 와인은 따로 분류해 판매했다. 오늘날의 세컨드 와인 개념을 17세기에 이미 도입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샤토 오브리옹은 그야말로 준비된 와인이었다. 곧 런던 귀족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최고급 와인으로 자리매김한다. 당시 궁정 대신이던 피프스라는 인물은 샤토 오브리옹 시음 노트를 남겼다. “우리는 로열 오크 태번에 갔다. 거기서 오브리옹이라는 프랑스 와인을 마셨는데 예전에는 맛보지 못한 아주 특별한 와인이었다.”
■‘로빈슨 크루소’ 작가도 들른 오브리옹 와인 투어
1666년, 아르노 3세는 아들 프랑수아 오귀스트를 런던으로 보내 ‘퐁탁스 헤드(Pontack’s Head)’라는 레스토랑을 열었다. 이곳을 기점으로 ‘오브리옹’을 알리고 유력 인사들을 보르도 영지로 초대했다. 일종의 ‘와이너리 투어’였던 셈이다. 존 로크를 비롯해 ‘로빈슨 크루소’를 쓴 대니얼 디포,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너선 스위프트 등 당대의 유명 인사들이 퐁탁스 헤드에 드나들었다. 영국 왕립학회는 이곳에서 연례 만찬을 열었다.
존 로크는 프랑스의 오브리옹 영지에도 방문해, 포도밭과 와이너리 시설을 둘러본 뒤 이런 기록을 남겼다. “영국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는 퐁탁가의 포도나무들은 서향 언덕에서 자란다. 땅은 아무것도 자랄 수 없을 것같이 보이는 흰 모래와 자갈이 섞여 있는 특이한 토양이다.
안내인은 ‘작은 실개천 건너 이웃 포도밭에서도, 토양은 같아 보이지만 결코 오브리옹과 같은 와인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제인 앤슨이 쓰고 박원숙이 번역한 ‘보르도 전설’ 인용)
존 로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아르노 3세는 샤토 오브리옹만의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보르도의 ‘샤토’ 개념 역시 그에게서 비롯했다. 동시에 그는 자기 와인의 특성을 잘 알고 마케팅한 사업가 마인드가 있는 생산자였다.
자신의 와인을 독점 전시 판매하는 숍과 바를 겸한 레스토랑을 운영해, 당대 오피니언 리더와 인플루언서를 움직였으니 말이다.
■끊긴 후손, 사라질 뻔한 오브리옹
그의 이러한 행보는 곧 다른 샤토에도 영향을 미쳤다. 1710년대부터는 라피트, 라투르, 마고 등도 자체 상표를 붙였다. 이들 와인도 런던 시장에서 일반 와인의 세 배에서 네 배 가격에 거래되었다. 150년 뒤에는 오브리옹과 함께 이들 와인은 ‘1등급’으로 분류된다.
아르노 3세의 노력 덕분에 샤토 오브리옹은 승승장구했지만, 역사의 현장에서 여러 곡절 또한 겪어야 했다. 퐁탁스 헤드를 운영하던 오귀스트가 후손 없이 생을 마감하면서 오브리옹은 한때 샤토 마고에 통합되었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프랑스혁명 직후에는 샤토를 국가에 몰수당하기도 했다.
그 몇 해 전, 후에 미국 3대 대통령이 될 토머스 제퍼슨이 보르도를 방문해 샤토 오브리옹 여섯 상자를 구입해 갔으니, 새옹지마라 할까, 상전벽해라 할까.
■나폴레옹이 등장시킨 와인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한 프랑스제국 시절에는 외무상이었던 탈레랑이 샤토 오브리옹을 매입했다. 그는 비록 단 3년을 소유했지만 샤토 오브리옹을 역사 현장에 등장시켰다. 바로 “회의는 춤춘다”라는 유명한 풍자를 남긴 빈회의에서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 빈에서 회의가 열렸다.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재로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대표들이 모였다. 이들은 프랑스혁명 이전으로 돌아가 왕정을 복고하고 유럽의 질서를 재편하려고 했다.
그런데 각국의 이해관계가 달라 대표들은 회의보다는 사교 파티와 춤을 즐겼다. 패전국 프랑스의 외무상 탈레랑도 이 회의에 참여했다. 그는 대표들에게 매일 샤토 오브리옹과 유명한 요리사 마리 앙투안 카렘의 요리를 대접하며 국익을 챙겼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 후로도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다 1935년에는 미국의 금융업자 클라랑스 딜롱이 샤토 오브리옹을 인수했다.
그의 증손자이자 룩셈부르크 왕자인 로버트가 2008년부터 샤토 오브리옹을 생산하는 도멘 클라랑스 딜롱(Domaine Clarence Dillon, DCD)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DCD에서 생산하는 와인은 하단 박스 안에 정리했다).
오브리옹의 역사를 보자면, 인걸은 간데없어도 명가의 와인은 남아 숙성될 따름이다. 필자의 와인셀러 안에서 오브리옹만의 독특한 전용병에 담겨 언코르킹할 명분을 기다리는 샤토 오브리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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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실 시대의창 대표(와인 어드바이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