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큰스님이자 우리시대 큰어른 월주 대종사가 지난 22일 입적했다. 법랍 68년, 세수 87세. 폐렴과 대상포진 등으로 동국대 일산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오던 스님은 이날 새벽 당신이 조실로 주석해온 전북 김제의 1400년 고찰 금산사로 옮겨져 상좌들과 생애 마지막 법담을 나누고 몇 시간 뒤 원적에 들었다.
“하늘과 땅이 본래 크게 비어있으니/ 일체가 또한 부처이구나/ 오직 내가 살아왔던 모든 생애가/ 바로 임종게 아니겠는가”
제자들이 전한 스님의 임종게는 이렇다. 스님의 삶은 스님이 두 번째 총무원장 시절 내걸었던 모토 ‘깨달음의 사회화’로 요약된다. 나 홀로 깨달음에 머물지 않고 중생구제에 힘써야 한다는 사자후다. 제자들 표현을 빌면, 불교의 상징 연꽃처럼 오염된 연못서 청명한 삶을 가꾸는 것이다.
고교시절 맞은 한국전으로 평화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먼저 출가한 친구스님을 따라 법주사에 갔다가 스님들의 평화로운 삶에 반해 한국전 종전 이듬해인 1954년 법주사에서 금오 선사를 은사로 출가한다. 조계종의 수행가풍을 진작하고 정화불사에 앞장서는 등 현대 한국불교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금오 선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월주 스님은 일취월장, 20대에 중앙종회 의원(1959~1960년), 조계종 제17교구본사 금산사 주지(1961~1971년)가 된다.
1980년 초, 조계종은 아직 40대인 월주 스님을 제17대 총무원장으로 추대한다. 신군부는 월주 스님에게 종단차원의 전두환 지지를 요구한다. 스님은 거부한다. 신군부는 종단 차원으로 안되면 ‘총무원장 월주 스님’ 이름으로라도 지지를 해달라고 요구한다. 스님은 또 거부한다. 스님의 반항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스님은 5.18 광주항쟁이 일어나자 광주를 방문해 사상자 가족들을 돌보는 등 시민의 편에 섰다.
그해 10.27일 새벽, 불교계 정화를 명분으로 전국 각지 사찰과 암자에 군경이 들이닥쳐 수천여 스님들을 짓밟는다. 이른바 10.27 법난이다. 월주 스님이 무사할 리 없었다. 스님은 23일간 모진 고문과 취조를 당한 끝에 총무원장직에서 쫓겨난다. 그렇다고 굽힐 스님도 아니었다. 풀려난 스님은 곧바로 그해 11월 기자회견을 갖고 법난의 진실규명을 위한 투쟁을 선언한다(8년 뒤인 1988년 10.27 법난 진상규명위 대표 취임).
깨달음의 사회화, 즉 스님식 상구보리 하화중생 활동은 경실련 공동대표(1989년), 1992년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나눔의집 개소, 1992~1995년 조국평화통일추진불교인협의회 회장, 1996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 불교인귄위원회 공동대표(1990∼1995),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1998) 등 광범위한 활동으로 이어진다. 1994년 조계종 분규사태 때는 사부대중의 지지로 다시 총무원장(제28대)이 되어 1998년까지 개혁종단을 이끈다. 이 기간에 스님은 개신교의 원로 강원룡 목사, 천주교의 상징 김수환 추기경과 수시로 교류하며 종교초월 상생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스님의 출마취소로 마무리된 총무원장 3선도전을 두고는 종헌해석 오류라는 동정론과 잘못된 욕심이라는 비판론이 엇갈린다.
스님의 ‘깨달음의 사회화’는 2000년대에도 계속됐다.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까지 보살행을 펼치고 있는 지구촌공생회 활동이 대표적이다. 2011년에는 스님에게 국민훈장무궁화장이 수여됐다.
만년의 스님에게 또 시련이 닥쳤다. 나눔의 집 운영을 둘러싼 MBC PD수첩의 폭로성 보도와 경기도의 징벌적 행정처분이 이어졌다. 스님은 해명할 틈도 없이 몹쓸 사람처럼 매도됐다. 스님의 건강이 올해 들어 급속히 나빠진 것은 MBC와 경기도 때문이라는 뒷말까지 나돈다.
진제 종정 등 불교계 인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 및 여야 지도자들, 기독교계와 천주교계 등 타종교 지도자들이 스님의 빈소가 차려진 금산사 조셰사 등을 찾아 조문한 가운데 스님의 영결식과 다비식(사진)은 26일 오전과 오후에 금산사에서 봉행됐다.
<
정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