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칼럼]억까와 억측 이제 그만!
2021-06-24 (목)
김태훈 목사/새누리 선교교회 담임
최근 한국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36세에 보수계 최대 야당 대표가 된 한 젊은 정치가가 (누구인지는 대부분 짐작을 할 것^^) 여당 대표를 만나 서로 “억까 정치하지 말자” 라고 다짐하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억까”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억지로 까는것”이란 뜻을 담고 있는 최신 유행어임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고개가 끄떡여 졌다! 그렇다. 정치판에서 이제까지 통용되었던 “억까”가 사라져야 비로소 건강한 의미에서 “공존”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목사이기에 정치이야기를 하는 것을 매우 꺼려하지만 “억까” 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정치 이야기를 살짝 하는 이유는 “억까”가 정치 뿐만아니라 우리의 삶 전반에 있어서 특별히 관계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기에 그렇다. 한 마디로 “억까”로 인하여 관계가 무너지는 것을 많이 보았다. 대인 관계에서 상대방을 깔아 뭉기려고 할때에 “억까”가 나온다.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어떠한 때는 “억까”로 인하여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까지도 몰고간다. 관계 파괴의 최고의 무기로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억까”와 더불어 관계 파괴의 또 다른 주범은 바로 “억측”이라고 생각한다. 짐작할 수 있듯이 “억측”은 “이유와 근거 없는 추측”이다. 상대방이 “억측”을 부린다면 정말 답이 없고 환장할 노릇이 되는데 이유는 “억측”이 오해를 불러오기에 그렇다. 나는 목회자로서 관계가 생명인데 “억측”으로 부터 야기되는 오해로 인하여 관계가 힘들어 질때가 있다. 최근에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분명히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한 사람이 나에 대해서 “억측”을 부리면서 큰 오해를 하게 되었다. 그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변명으로 들려진다 하며 받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설명을 하면 할수록 또 다른 오해를 불러왔다. 정말 미치고 환장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나에 대한 “억측”을 부리다 보니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억까”를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참으로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다. 그나마 시간이 지나면서 “억측”과 “억까”가 멈추어 지고 이 사람과 회복의 단계에 들어갔지만 상처가 아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것 같다…
이런면에서 “억까”와 “억측”은 인간 관계를 파괴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하는 쌍두 마차 라고 여겨진다. 분명히 정치판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 교회에서 심지어는 가정에서 관계를 가장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억측”을 멀리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억측”을 자제 하고“억까”를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답을 얻기 위하여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떠오르는 것이 바로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본다면 “억측’을 하는 것이 어려워질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억까”를 하지 않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볼 줄 아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을 것 같다. 실제로 최근에 한 성도와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목회자들은 성도의 입장과 마음을 정말 모른는 것 같다” 라는 것이었다. 항상 목회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다 보니 정작 성도의 입장과 마음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라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오래전에 내가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평신도로서 섬기던 교회 담임 목사님이 내게 종종, “성도는 죽었다 깨나도 목사의 마음을 모른다…”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실제로 내가 목사가 되어보니 그 말이 절대적으로 사실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이 성도의 말은 거꾸로 목사는 죽었다 깨나도 성도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정말 한 방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그 말 또한 사실인 것이 인정이 되자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앞으로 성도의 입장에 서보리라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볼 줄 아는 것은 말은 쉬울 수 있으나 나에게는 그러한 능력도 없고 인격도 되질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길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바로 나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와 하나가 되려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 즉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나의 마음에 모실때에 비로서 그 분의 사랑과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실체가 됨으로 “억까”와 “억측”을 멈추고 진정으로 공존하는 사회와 교회와 가정이 되길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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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 목사/새누리 선교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