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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과학(4)]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2021-02-05 (금)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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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과학(4)]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줄여서 금강경. 약 2600여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엮은 경전 중 하나다. 약 1300년 전 당나라의 시골뜨기 총각에게 머리가 확 깨이는 깨달음을 주어 육조 혜능 대사로 거듭나게 했다는 경전이 금강경이다. 100여년 전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고행 속에 수행을 거듭한 끝에 깨달음을 얻고나서 이 종교 저 종교 이 경전 저 경전 살펴보다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무릎을 탁 쳤다는 경전이 금강경이다. 어려서 읽힌 한학 말고는 배움의 흔적, 특히 서양학문을 배웠다는 흔적이 별로 짚혀지지 않는데도 요즘 과학자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수학 물리학 천문학 등 여러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금타 화상(청화 큰스님의 은사)이 20세기 초 항일시위에 가담했다 절로 피신한 뒤 '우연히 혹은 당연히' 읽고서 불교에 귀의하게 됐다는 경전 또한 금강경이다.

공(空).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금강경의 딱 하나 키워드는 이것이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하는 모든 것이 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 그곳 인연에 따라 다만 그렇게 보이고 들리고 만져질 뿐이라는 것이다. 때에 따라 곳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인연이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 따위에 집착해 일희일비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여실히 알고 행하는 것이 무명을 타파하는 것이요, 무명이 타파되면 바로 열반의 경지라는 가르침이다.

산스크리트어 원전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바즈라체디카 프라즈냐파라미타 수트라)를 원뜻을 살려 한자어로 옮기니 금강경이다. 영어로는 Diamond Sūtra다. 그런데 단어의 원뜻보다 거기에 담긴 함의를 살려 ‘Perfection of Wisdom’(지혜의 완성 또는 완벽한 지혜)로 번역되기도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느 것 하나 가볍거나 덜 소중한 것이 있으랴만 금강경의 위상을 눈 비비고 다시 보게 하는 번역이다. 대한불교조계종 등 선종계통의 모든 종파들이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는 이유를 알 만하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모든 현상(相)은 다 허망하니 모든 현상이 진실상이 아닌(非相)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보는(여래가 되는) 것이니라...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의 있다고 하는 것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보아야 하느니라.”

금강경에는 보이는 것이 실재가 아님을 일깨워주는 이런 사구게 형식의 가르침이 수두룩하다. 신실한 불자인가 아닌가를 떠나 이런 가르침 또는 깨우침은 불교의 ‘ㅂ’자라도 스친 곳이라면 그곳 보통사람들의 일상에도 적잖이 스며들었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남도 흥타령에도 이런 대목이 있잖은가.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너도 나도 꿈속이요 이것 저것이 꿈이로다, 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가는 인생, 부질없다, 깨려는 꿈, 꿈은 꾸어서 무엇을 할거나.”

그런데다. 하도 과학 과학 하는 시대다보니 이제는 종교니 민요니 하는 건 그 알맹이를 살펴보기는커녕 포장지를 뜯기도 전에 벌써 곰팡이 냄새가 난다고 코부터 틀어막는 이들이 한둘 아닐 터다. 이런 이들에게 맞춤형 마음공부 책이 있다. 불교책 아니다. 과학책이다. 카를로 로벨리라는 현대물리학의 거장이 몇 년 전에 내놓은 역작이다. 근 3년 전에 한국어판도 나왔다.

‘보이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

영락없이 금강경을 압축한 듯한 이 제목은 한국 독자들의 입맛을 감안해 시쳇말로 ‘뽀샵질 혹은 마사지질’을 한 게 아니다. 이탈리아어 원제(La realtà non è come ci appare)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영어로는 Reality Is Not What It Seems.


‘제2의 스티븐 호킹’ ‘우리시대 우주의 대가’라는 경칭을 듣는 저자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을 융합한 관점에서 광대한 우주와 시공간의 실재를 탐구하는 이 책을 강의 형식으로 서술했다. ‘... △세 번째 강의: 시간과 공간에 관하여 05 시공은 양자다 06 공간의 양자 07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 네 번째 강의: 우리가 보는 세계 너머 08 빅뱅을 넘어서 09 확증 가능한 것 10 블랙홀의 열 11 무한의 끝 12 정보, 정의되지 않은 생각 13 신비’와 같은 식이다.

출판사의 책 안내도 다분히 금강경의 가르침을 닮았다.

“...카를로 로벨리는 이 책에서 우리를 ‘시간이 없는 우주’로 이끈다. 우주라는 공간에서는 시간이라는 변수가 없고, 과거와 미래의 차이도 없고, 때때로 시공간도 사라진다... 이 믿기 힘든 놀라운 이야기들, 시간의 본질에 대한 신비로운 내용들은...”

귀에 익은 말 아닌가. 책은 인터넷 서점 등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유튜브를 통해 이 책의 전체의 대강이나 다양한 해설을 들을 수도 있다.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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