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바람 사이로 포근한 햇볕이 내리쬔다. 마른 대지에 비가 내린다. 초목에 물이 오른다. 사람 사는 세상은 코로나에 발목이 잡혔지만 초목 사는 세상은 봄볕을 받아 봄비를 맞아 생동하기 시작한다. 새크라멘토 영화사 뜰 매화도 춥고 긴 겨울날 겨울밤을 꿋꿋이 버티더니 마침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촬영-동진 스님>
설중매’라는 단어의 배경엔 한겨울의 눈 내리는 산사가 있다. 법당 안의 천수물도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 한 시간 정근을 마치고 내려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는다. 때마침 흰 눈이라도 펑펑 내리면, 괜시리 서러워서 망상도 같이 흩날린다. 그렇게 시린 손을 불어가며 요사채로 돌아갈 때, 어디선가 미미한 향기가 날아오고, 그 향기 끝에서 눈 속에 핀 매화 한 송이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 한 소식 터지는 때이다. 이것이 중의 세상에서 설중매가 가진 배경과 힘이다. 왜 선사 스님들은 고래로 매화를 얘기했는지 알게 해주는 힘. 그런 매화가 영화사에도 있고, 올해도 어김없이 매화가 피었다. 이 중이 볼 때마다, 아, 아, 하는 이 꽃이 여기선 그저 평범한 꽃, 따먹지도 못하는 과실나무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설중매에 대한 업식이 지구와 저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떨어진 이곳 사람들과 이 산승은 매화로 서로 만날 접점이 없다. 비단 설중매뿐이겠는가. 미국사람과 한국사람, 그것도 산중에서 내려온 중임에랴. 이것이 ‘각자의 세상’에 산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와 나’는 절대로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라는 뜻이다. ‘세상’을 자신이 살고 있는, 집, 동네, 도시, 지구로 알고 있는 한, 그곳에서 온 세상 사람이 똑같이 함께 살고 있다고 믿는 한, 이 도리를 영원히 알 수 없다. 물질적 ‘안이비설신의’를 똑같이 갖고 있다고 믿기에, 각자의 정신적 ‘색성향미촉법’이 다른 것 또한 이해하기 쉽지 않다. 설중매가 있는 세상과 그렇지 않은 세상처럼, 사람 사이에 완벽한 이해, 백프로 공감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다. 예를 들어, 의사당엘 쳐들어간 사건 하나를 두고도, 혹자는 틀렸다 하고 혹자는 맞다 하고 대부분은 관심없다. 이 셋이 소통할 수 있는 접점은 없다. 서로 소통하려고 하면 할수록, 시비가 일 뿐이다. 처한 세상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의 소통불가는 언제나 내 입장부터, 라는 이기에서 발발한다. 자기 세상이 옳다,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인즉슨 모두가 옳다, 라는 것이다. 모두가 옳은데 시비다. 아이러니다. 결국, 이러한 아만의 세상에서는 소통이란 없다는 말이 된다. 정보는 넘치고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지식도 많은데, 소통은 갈수록 어려운 이유는, 그만큼 더 각자의 세상이 견고해졌기 때문이다. 충분히 알아서, ‘너’에 대한 필요가치가 없어졌다. 인터넷 세상이 다 해준다. 그곳에선 사람을 만나 부대끼며 양보하며 배우지 않아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 소통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을 주장하고 선택하게 된다. 그러한 습이 아집을 점점 견고하게 만들 건 당연한 이치다. ‘내 세상’ 속에 갇히게 된다는 거다. 그 ‘나’가 있어서 ‘너’도 있고 시비도 있다. 이것을 깨달아 알면 세상 시비에서 자유롭다. 그래서 불교에선 ‘무아’를 알자는 것이다. ‘나’를 버리고 ‘무아’임을 알면, 내 맘을 몰라줘도, 상대방이 많이 이상해도 이해가 된다. 소통이라는 것이 ‘내’가 좋은 대로, 편한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내’가 있음으로 해서 소통불가가 발생함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이다. 즉, 소통은 ‘나’와 같아지길 바라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다른 것에 대하여, 다르다는 이유로 싫어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게 잘 안되는 게 문제고, 그걸 잘되게 하자는 것이 수행이다. 결론은 항상 같다. 마음공부 얘기다. 알아도 안되므로 수행이 필요하다. 그 수행이 시나브로 익으면, 세상 시비에서 놓여나, 그저 ‘오늘, 여기’를 살 뿐, 다른 게 없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매화 피고 봄이 오고 있다. 당신의 봄과 이 중의 봄은 영원히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소중하다. 언제나 낯설어서, 알 수 없어서, 미지의 땅을 여행하듯, 늘 처음이라 새롭고 설레어서, 좋다. 새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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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스님 (SAC 영화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