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내리는 시계, 늘어진 시계로 유명한 20세기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대표작 <기억의 지속>.
올 한해가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던 이라도 “아니 벌써?!” 소리가 절로 나올 요즘이다. 해마다 이맘 때면 대개 그럴 터다. 도대체 시간이 뭐길래?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에겐 한 시간이 하루처럼 느껴질 것이고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에겐 하루가 한 시간처럼 느껴질 것이다. 줄곧 앞서다 막판에 몰린 복서에겐 1초1초가 10분 100분처럼 느껴질 것이고 줄곧 밀리다 모처럼 기회를 잡은 복서에겐 막판 1초1초가 10분의1초 100분의1초처럼 느껴질 것이다. 가을이 세 번 바뀌듯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는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란 말도 있고, “번쩍 하면 백년인데 수행 않고 방일하랴”며 나태없는 정진을 권하는 말씀도 전해진다. 해니 달이니 하루니 반나절이니 시간이니 분이니 초니 하는 건 시간의 어떤 뭉치를 가리키는 단위일 뿐이다. 시간 그 자체는 아니다. 시간의 본질에 대해서는 동서를 막론하고 고래로 많은 주장들이 나타나고 비교되고 정리되고 더러는 사라지고 했다.
아이작 뉴턴 경(Sir Isaac Newton, 그레고리력 1643년 1월4일~1727년 3월31일,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25일~1727년 3월20일)이 정립했다고 일컬어지는 고전물리학에서는 “수학적이며 진리적인 절대시간은 외부의 그 어떤 것과 상관없이 그것 자체로 흐른다”는 것이었다. 언제든 어디서든 균일하게 흐르는 실체로 파악된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거두 로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년 3월14일~1955년 4월18일)에 이르면 시간의 절대성이 무너진다. 우주의 곳곳마다 다르게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간은 공간과 불가분의 관계, 사실상 한덩어리다. 즉 시공간이다. 실제로 우주적 관점에서는 스페이스타임(spacetime)이나 광년(lightyear)처럼 시공간이 하나로 얽힌 단위들이 흔히 쓰인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에 관한 많은 비밀들이 풀렸거나 풀이됐다. 예컨대, 내일은 그냥 내버려둬도 오고야 마는데 왜 어제는 아무리 용을 써도 다시 오지 않는가에 대해 과학은 열역학 제2법칙이니 엔트로피니, 보통사람들로선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 같은 말로 ‘똑소리나게, 실은 감히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게’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그러니까, 거꾸로 흐를 수 없다고? 일단은 그렇다. 궁극은 그렇지 않다. 뭐라고? 근년들어 쏟아진 시간에 관한 과학서들은 간신히 잡아놓은 보통상식을 다시금 뒤집는다. 시(공)간에 방향성이 없다면서 거꾸로 흐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궁극에는 시간은 아예 흐르지 않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한다. 시간은 다만 인간의 불완전한 감각이 느끼는 환상일 뿐이라 한다.
그런데 현대물리학은 고사하고 고전물리학도 정립되기 훨씬 이전인 근 2,6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도대체 어떻게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찾을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가르쳤을까? 금강경 제18 일체동관분의 끝자락을 다시 보자. “...수보리여,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이란 모두가 마음 아닌 것을 설함이며 그 표현을 마음이라고 하기 때문이니라...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느니라...”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에 대한 보충설명이 필요하면 중국 당나라 때 자칭타칭 ‘금강경박사’로 통했던 선승 덕산 스님이 길거리 떡장수 노파에게 다름아닌 “금강경 가운데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으로 점심을 드시겠소?” 한마디에 그만 찍소리도 못하고 물러섰다는 일화를 거듭 찬찬히 음미해보거나, 서울대 천문물리학부 소광섭 명예교수가 몇해 전 법보신문에 연재한 ‘불교의 시간관’ 시리즈를 숙독해보면 좋을 것이다.
시간에 대한 과학서를 원한다면, UC버클리 물리학자 리처드 뮬러 작 <나우, 시간의 물리학>, 뉴욕타임스 과학부장 출신 <제임스 글릭의 타임 트레블>, 캘린포니아공대 물리학교수 숀 캐럴의 역작 <현대물리학, 시간과 우주의 비밀에 답하다>, 제2의 스티븐 호킹으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 박사의 2017년 작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권한다. 참고로 로벨리 박사가 그 전에 내놓은 책 제목은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였다.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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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