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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등] 계

2020-11-26 (목) 동진 스님 (SAC 영화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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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은 동안거 결제일이다. 음력으로 시월 보름이라, 양력 날짜는 늘 같진 않다. 동안거란, 방부를 들인다, 라고 해서, 각지의 선객들이 자신이 공부할 선방을 찾아가 일정기간 지내는 것을 말하고, 이 기간을 일러 결제일이라고 한다. 이 석달 기간 동안엔 선방에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는 건 물론이지만, 스님들도 외부로 나올 수 없다. '결계를 친다'라고 해서, 보이지 않는 경계를 세우고, 그 안에서만 살게 된다. 그 경계 안의 세상, 계는 일반인들이 사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아마도 설명을 들었어도 뭐라는 건지,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이처럼 평소엔 우리가 자주 접하지도, 알 수도 없는 '계'가 이 세상엔 무수히 존재한다. 은하계, 인간계, 동물계, 식물계, 정계, 재계, 법조계, 예술계, 연예계, 사교계...왜 계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 계는 계 앞에 붙은 이름, 이를테면 은하계는 은하를, 동물계는 동물을 한정하는 범위, 라는 뜻이다. 마치 결계를 치는 것처럼, 그 계의 바운다리가 구분, 한정 되어 있다는 뜻이며, 그 한정, 에는 얻기도, 넘기도 어렵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무수히 많은 계 중에서 평생 과연 몇이나 만나며 살 수 있겠는가. 알 수는 있겠는가. 정치계 사람들을 진정 이해할 수 있는가 ? 그럼에도, 우리는 이 수많은 계를 당연히 안다고 여기며,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여기며 산다. 심지어 동물계, 나아가 천상계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하지만 모른다. 모른다는 것보다 더 믿기 어려운 건, 계는, 당신이 만든 벽이고 차별이고 경계고 한정이고 간극이고... 그렇다는 점일 것이다.

애초에 이 계라는 것은 편의로 인간이 정한 것일 뿐, 실상은 없다. 그 없는 벽을 뛰어넘으려 애를 쓰고 고생하고, 좌절하고 초라해지며, 싫어하고, 반목하며 사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모르는 걸 쉽게 얻을 순 없다. 알든 모르든 계는 없다. 그 계를 규정짓는 것은 허공에 금 긋기와 같은 것이다. 사교계에 입문 하려면 어디서, 어느 벽을 어떻게 넘어야 하는가. 아무리 세상은 없다, 라고 해도 못 믿으니, 이렇게 계를 통하면 이해가 좀 쉬울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계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 믿는 치심 때문이다. 당신 마음이란 거다. 이것이 와 닿지 않을 것이란 걸 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당신이 생각하는 은하계, 우주도 당신을 통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 당신이 우주를 생각조차 않는다면, 당신은 우주를 있다, 없다 넓다, 높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결국 우주의 유무도 당신이 정한다.

세상 모든 것이 이와 같다. 불교에서는 이런 세상을 법계라 부른다. 정확히는 '일심법계, 인연법계'이다. 인연 따라 꽃이 되고 바람이 불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공이며. 그 또한 마음이다. 그 마음의 자리에 따라, 삼계, 욕계, 색계, 무색계로 나눈다. 삼계, 혹은 삼독. 탐진치를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다. 다시 말하자면. 탈 삼계, 욕계,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색계, 화와 같은 나쁜 감정으로부터의 자유, 무색계, 어리석은 생각으로부터의 자유다. 텅 빈, 허공 같은 마음이다. 아무리 결계를 쳐도, 보이고 안보이고는 당신 만의 것이고, 당신이 정하는 대로 세상은 열리거나 닫힌다. 선방에 들어간 스님들은 스스로 계에 갇혔으나 자유롭다. 세상에 수많은 계가 있고, 그것이 당신에게 벽으로 느껴진다면, 설사 계 안에 있어도, 밖에 있어도 부자유다. 계에 달려있지 않다는 증거다. 아무도 가두지도 막지도 않았다. 단지 당신이 걸리면, 그곳에 벽이 있다. 처처에서 아무데도 걸림 없이 벗어나 있다면, 당신은 이미 해탈이다. '무안(이,비,설,신)계 내지 무의식계...' <반야심경>에도 계는 없다고, 이미 나와 있다. 없으니 뭐 어쩌라고, 싶으신가? 어째야 겠는가?

<동진 스님 (SAC 영화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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