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를 잊은 채 미국에서 열심히 살며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었다. 살고 있는 하늘을 바꾸고 그렇게 싫어하던 나의 성(last name)을 바꾸었어도 내 안에 있는 슬픔과 두려움, 분노는 아주 작은 일에도 나를 덮치곤 했다. 그렇게 이십오육년이 지났다.
어느 날 어머니들의 회복 모임에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라는 숙제를 받았다. 한밤중에 편지를 쓰려는데 다시 화가 치밀었다. 예수를 믿고 입으로 용서하기를 몇 번인가. 그런데 아버지를 생각하면 또 화가 났다. 엄마를 기쁘게 해야 한다는 나의 강박은 나의 모든 생활을 주장했고, 숙제라는 이름의 것은 꼭 해야 하는 것으로도 연결이 되어 있었다. 자정이 지나도록 나는 아버지에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빨리 자야 하는데… 용서는 다 이미 했는데…
그런데 문득, “용서를 하라는 것이 아니고 용서를 빌어라” 하는 말이 내 마음으로 떠올랐다. “주님, 용서를 빌라니요?? 다 아시잖아요.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 그렇게 한번 오셔서 만나보시라는 청도 매정하게 거절하고, 끝내 오지 않으셨던 것도 용서했고, 돌아가셔서도 다른 여자 옆에 누워 있는 아버지도 용서했다고요.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런데 절 보고 용서를 빌라니요.” 나는 그 말이 믿기지도 않고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항의 변명하다가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긴가민가,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앞에 하얗게 질린 김포공항에서의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까만테 안경을 쓴 아버지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질려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곤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들. 아버지는 몇 날을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공항에 나왔을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오지도, 나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한쪽에서 내가 눈치채기만을 기다리던 아버지. 그가 내민 작은 종이 쪽지는 내가 뿌리쳐 바닥에 떨어진 채였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와 가눌 수가 없었다.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를 몇 번이나 쏟아냈는지 모른다. 한평생 나를 괴롭히던 ‘버림받는 두려움’ ‘거절감’ ‘수치심’ 이런 것들을 나는 단 한번에 아버지에게 안겨주었던 것이다. 방바닥을 구르며 그렇게 울기를 한참. 마음이 잠잠해지며 아버지는 나를 용서하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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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영 (가정사역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