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중구난방으로 보일 정도로 지방자치가 발달한 나라다. 지방 선거는 그래서 지역 주민에게는 대통령 선거 못지 않게 중요하다. 지역 사회에 직접 영향이 클 뿐 아니라 정치 신인이 첫 발을 내딛는 디딤돌 역할도 한다. 올해 선거를 통해 드러난 것은 LA의 정치지형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다. 크게 2가지 점에서 그렇다.
우선 올해부터 LA시 선거는 짝수 해에 실시되고 있다. 홀수 해에서 바뀐 것이다. 홀짝 바뀐 것이 무슨 큰 변수인가 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
홀수 해 시 선거는 투표율이 20%를 넘지 못했다. 선거 때마다 낮은 투표율이 문제였다. 대통령이나 주지사 선출과는 관계없는 별도의 선거에 유권자들은 큰 관심이 없었다. 동네 선거였다. 늘 하던 사람들이 투표하고, 그들만의 선거로 끝났다.
그런데 올해처럼 대선과 맞물리자 투표율이 급증했다. 지역 정치에 무관심하던 이들이 대거 투표에 몰렸다. 후보들로서는 전혀 다른 선거인단이 새로 구성된 셈이다. 새 선거인단은 성격도 전과는 달랐다. 더 많은 세입자, 소수계, 젊은 유권자들이 투표 대열에 합류했다.
LA시 4선거구 데이빗 류 시의원의 경우 지난 2015년 예선에서3,600표, 본선에서는 1만3,000표를 얻어 당선됐다. 하지만 올해는 예선에서 3만4,000표, 본선에서는 6만표 가까이를 얻고도 낙선했다.
소수계가 선출직에 나아가려면 투표율이 낮은 것이 선거전략에서 유리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한인 후보들은 보궐선거나 대선과는 별도로 실시되는 지방선거를 중점적으로 노려왔다. 이런 전략이 더 이상 LA에서는 통하지 않게 됐다.
LA시 선거를 대통령 선거가 있는 짝수해로 돌린 것은 투표율을 높이고, 선거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 였다. 누구도 거부하기 어려운 대의명분이었다. 허브 웨슨 시의원이 앞장 섰고, 많은 한인도 찬성했다. 이런 변화가 부메랑으로 돌아와 이번 웨슨의 낙선 원인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변화는 LA시는 이번 선거를 계기로 더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이다. 급진 진보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이들이 LA정치의 주류로 자리잡고 있다.
다른 지역에 불었던 바람과는 다르다. 캘리포니아만 해도 공화당이 연방하원 선거에서 약진하고 지나치게 진보적인 색채의 주민발의안들은 거의 모두 부결됐다. 급진 진보가 유권자들의 우려와 반감을 불러 일으키면서 숨어 있던 보수를 일깨웠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LA는 민주당 중에서도 더 급진적인 후보들이 민주 대 민주 대결에서 모두 승리했다. 대표적인 예는 카운티 검사장 선거에서 흑인여성인 현직 재키 레이시를 물리친 쿠바 출신의 이민 1세 조지 개스콘, LA시의원으로는 2003년 이후 처음 현역인 데이빗 류를 물리친 인도계 니디아 라만, 카운티 수퍼바이저 선거에서 웨슨을 누른 홀리 미첼 등이 꼽힌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상대 보다 더 급진적인 공약을 내세우면서 급진 좌파의 아이콘인 버니 샌더스의 공식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다. 특히 한인타운이 포함된 연방하원 34지구에서 의의로 선전한 데이빗 김 후보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한인들에게는 ‘많은 데이빗 김 중의 한 사람’ 으로 생각될 정도로 지명도가 낮은 정치 신인인 그는 이번 선거에서 47%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며 현직인 지미 고메즈 의원을 압박했다. 그는 전 성인 주민에게 월 1,000달러 현금지원을 공약으로 내건 유일한 후보였다.
상대적으로 더 보수적인 존 이 LA 시의원이 지난 예선에서 가까스로 과반 득표를 넘겨 11월 본선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 따랐다고 할 수 있다. 경찰해체까지 주장하는 급진 운동은 그 뒤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시안에게는 금단의 땅이었던 LA시의회에 지난 2015년 류 의원이 입성했을 때 그는 새 피였다. 한 젊은 민주당원은 “그가 당선됐을 때와 똑 같은 모멘텀에 의해 이번에 밀려난 것”이라고 전한다. 더 새 피가, 그 전 새 피를 밀어낸 것으로 비유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이후 BLM 운동을 거치면서 거세진 LA의 급진 바람에 휩쓸렸다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에는 심각한 홈리스 문제 등 LA가 처한 사회경제적 환경이 배경으로 있다. 인종 분포 등 주민의 구성비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류 의원과 같은 6살 때 이민 온 하버드와 MIT 출신의 쌍둥이 엄마 라만은 홈리스 권익운동 등을 펴는 액티비스트로, 600명의 자원봉사단이 8만3,000가구의 현관문을 두드리는 억척 풀뿌리 캠페인을 펼쳤다고 한다.
급진 바람이 불고 있는 LA에서 중도 성향인 대다수 한인 민주당원들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자영업 중심의 한인들의 이해와는 어긋나는 일이다. LA한인들의 공직 진출은 당분간 더 어렵게 됐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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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