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2만 개의 별

2020-06-25 (목) 12:00:00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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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가 더위에 약하리라는 기대섞인 관측은 빗나갔다. 여름이 됐지만 코비드-19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더 기승인 곳도 있다. 바이러스는 변하지 않았는데 사람들만 변했을 뿐이다. 두려움에 익숙해지고, 피로감만 커졌다. 전문가들은 “아직 숲을 빠져나온 것이 아니다”고 잇달아 경고했으나 각 지역정부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문을 열었다. 물론 경제도 재가동시켜야 했지만 역풍은 감내할 수밖에 없다. 경제냐, 바이러스냐 선택의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바이러스는 당적이 없지만 코비드-19의 대처 방법은 아주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과학의 자리는 더 좁아지고 있다. 콘서트도, 메이저리그 야구도 금지된 마당에 사회적 거리두기도, 마스크도 실종된 대규모 실내 정치집회가 열리고 있는 미국-. 이런 미국에 대해 코비드-19 대응을 아예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확진자 한 명이 발생하면 전염원과 2, 3차 감염자까지 추적해가며 확산방지에 안간힘을 쓰는 한국에 비해도 미국의 대응은 대응도 아니다. 그래서 ‘잠깐 역이민’을 택한 한인들도 있다. 이 험구한 때 굳이 미국에 있을 필요가 없거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사태가 진정되려면 백신 개발이 조속히 이뤄지는 수밖에 없다. 그 때까지는 코로나와 함께 사는 법을 찾아야 한다. 바이러스도 어쩔 수 없는 일상의 한 구성원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백신이 개발돼도 끝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코비드-19 완치자들에게 면역력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정 기간이 지난 뒤 항체가 사라진다는 보고가 있다. 이 말은 백신 효과가 한시적이고, 독감처럼 주기적으로 개발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로나는 빠른 유전자 변이로 공격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코비드-19를 둘러 싼 초기의 많은 가설들이 가설에 불과했듯, 이 또한 가설이길 바랄 뿐이다.

주목받지는 못했으나 지난 6월16일은 기록될 만한 날이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미국의 코비드-19 사망자는 1차 대전의 미국인 사망자 수를 넘어섰다. 인명 손실을 기준으로 하면 1900년 이후 전쟁과 전염병 등의 재난으로 숨진 미국의 3대 사건은 스페인 독감, 2차 대전, 1차 대전의 순이었다. 1차 대전 때는 11만 6,500명이 숨졌다. 현재 미국의 코로나 사망자는 12만명을 넘어섰다.

숫자로 본 세계는 일목요연하다는 것이 강점이다. 한 눈에 상황이 파악된다. 미국의 코비드-19 사망자가 10만명을 돌파한 것은 불과 한 달 전이었다. 국립 앨러지 & 전염병 연구소장인 앤소니 파우치 박사가 처음 예상했던 최저치였다. 그보다 한 달 전에는 10년을 끈 베트남전 사망자 수를 넘어섰다.

사망자가 10만명을 넘어섰을 때 뉴욕타임스는 1면 등 4개 면을 털어 1,000명의 부고 기사를 실었다. 희생자 10만명 중의 1%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미국의 주요 언론에는 일제히 희생자들의 스토리가 실렸다. 10만이라는 상징이 컸다. 하지만 이마저 옛날이야기가 돼버렸다.

지금 코비드-19로 인한 죽음은 12만분의 1의 죽음이다. 보스턴 글로브 지는 하루에 부고면이 23면에 이른 날도 있다. 죽음이 그만큼 흔해졌다. 한 죽음의 실물감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하지만 표정없는 숫자는 그것까지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숫자 뒤의 현실을 실감하려면 당사자가 돼봐야 한다.

고도의 전염성 때문에 한 집에 사는 가족이 불과 며칠 차이로 숨지는 예는 많다. 일가족의 구심점이었던 할머니와 엄마가, 아버지와 아들이 불과 며칠 사이로 세상을 떠났다. 누구도 누구의 죽음을 지켜주지 못했다.

볼티모어에서는 15세 소녀도 숨졌다. 다중 감염증세가 원인이었다. 메릴랜드 주의 최연소 사망자로 기록됐었다. 16세 생일을 한 달 앞뒀다고 가족들은 애통해 했다. 리버사이드에서는 21세 처녀가 숨졌다. 양로원의 간호 조무사였다. 이 양로원은 그녀의 첫 직장. 돌보던 노인 중에 확진자가 있는 것을 알았지만 그걸 이유로 결근하겠다고 말을 꺼낼 형편이 아니었다.


유쾌한 장년, 마켓 캐시어나 길모퉁이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도 즐겨 농담을 주고받던 북가주 길로이의 남성도 숨졌다. 가족들은 그가 잘하던 악수 때문에 바이러스가 옮겼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리버사이드 셰리프 국에서는 지난 3월에만 50대 셰리프 2명이 코로나로 숨졌다. 한 사람은 감염된 재소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재소자와 경관은 나란히 한 병원에 입원했으나 셰리프 경관이 먼저 코로나에 무릎을 꿇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은 누구의 가슴에는 별로 남는다. 그 별이 12만 개가 넘었다. 얼마나 더 많은 새 별이 생길지 알 수가 없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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