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버지와 아들

2019-10-31 (목) 12:00:00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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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10일 시작됐던 서머타임이 이번 일요일인 11월3일에 끝난다. 이제 낮이 한 시간 짧아지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80년대 후반 한때 서머타임제가 도입된 적이 있다.
우선 회사원들이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일과 후 술집에 가는 것이 직장문화의 일부인 것처럼 여겨지던 그 시절. ‘술시’가 됐는데 날이 훤했다. 매일 낮술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한국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이 때문에 술 소비 증가율도 둔화됐다. 한국의 서머타임제는 없던 일이 됐다. 서머타임은 한국문화에 맞는 제도가 아니었다.

서머타임은 그 유래가 여러 가지 전해 오지만 골프를 한 시간 더 치기 위한 아이디어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야외활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국의 서머타임은 가족들에게 다양한 야외생활을 즐길 시간을 갖게 한다. 일찍 일을 시작하는 미국직장의 아버지들은 오후 3시쯤이면 퇴근해 그때부터 공원에서 아이들과 캐치볼도 하며 같이 뒹군다. 미국 소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모습이다.

지난 8월 남가주 풀러튼 시의 골든힐스 리틀리그 올스타팀이 주니어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3~14세부 야구에서 세계 정상에 올랐으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한인 청소년들이 팀의 주축이었다고 한다. 눈길을 끈 것은 아들은 투수, 아버지가 팀의 코치였다는 보도였다.


보이스카웃과 리틀리그 등은 실은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하는 활동이다. 아들이 팀원이 되면 아버지는 자원봉사자로 이런저런 팀의 일을 돕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민 1세 아버지들은 대부분 아들을 다른 아버지들에게 맡겨 버리고 얼굴을 비치지도 않는다. 픽업도 주로 어머니의 몫. 어머니들은 딸과는 ‘같은 여자끼리’여서 친하고, 아들과도 아버지에게 말 못할 것들을 소곤거린다. 아버지와 아들은? 아들과 둘이 차를 타고 한 시간을 가는데 할 말이 없었다고 한 아버지는 말한다. 라디오 볼륨만 높였다고 한다.

골든힐스의 투수였던 카일 김 군과 팀 코치인 아버지 에드 김 씨를 만났다. 어머니 김선주 씨도 함께 나왔다. 고교 9학년인 카일은 클럽 팀에서 막 연습을 마치고 나오는 길. 졸리는 눈치여서 차에 자러가도록 보낸 뒤 아버지 에드 김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민 2세인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야구를 했던 리틀리그 출신. 특히 아들보다 32년 먼저 주니어 월드시리즈를 제패한 적이 있어서 이번 대회가 끝난 뒤 화제가 됐었다.

그가 로랜하이츠 리틀리그에서 뛸 때 이민 1세인 그의 부모도 늘 그를 뒷바라지하기는 힘들었다. 야구장에 갈 때 코치가 태우러 오고, 친구네 차를 얻어 타거나 자전거로 가기도 했다. 카일이 처음 리틀리그를 할 때는 아버지가 따라다닐 수가 없었다. 오렌지카운티에서 트래픽을 뚫고 LA 북쪽의 직장으로 출퇴근을 하던 때였으니까.

아들이 야구를 하는데 시간을 내야하지 않느냐고 아내가 참견도 하고, 마침 직장도 멀지 않은 곳으로 옮겨 오는 바람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5년여 간 그는 아들 팀의 코치로 그라운드를 함께 누비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간을 맞추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들과 그 친구들에게 필딩, 히팅, 베이스 러닝 등 야구 기초를 가르치며 함께 땀을 흘렸다. 그는 이사로 리그운영에도 참여하고 있다.

야구를 좋아하는 한인은 많아도 막상 리틀리그에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는 많지 않았다. 토요일에도 일을 하는데다, 시간이 주말 한국학교와 겹칠 때가 많아 한글교육과 야구,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도 어려움이었다. 특히 카일처럼 클럽 팀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 타주 원정도 잦아 교회 예배시간과 겹친다며 망설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39개 팀이 소속된 풀러튼의 골든힐스 리그만 해도 팀마다 한인선수가 최소 2~3명은 되고, 자원봉사하는 한인부모도 늘고 있다고 한다. 한인사회가 점차 1세에서 1.5세나 2세 중심으로 바뀌면서 리틀리그 그라운드의 풍경도 바뀌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야구는 리틀리그에서 시작된다. 지금은 18만개 팀에 260만 명이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LA 다저스의 코디 벨린저나 LA 엔젤스의 마크 트라웃 등도 모두 리틀리그 출신들. 공을 막대기 위에 올려놓고 치는 티볼부터 시작하는 리틀리그는 운동장에 온 가족이 모이는 기회이다. 티볼에서는 공중볼 하나를 잡는 것도 대단한 일.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환호와 박수를 쏟아 내면서 가족은 함께 하는 기억을 쌓아 간다.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을 만든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힘들면 힘든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시간을 함께 했을 때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근육이 붙게 된다. 카일은 야구선수가 되는 게 꿈이다. 부모는 최선을 다해 아들의 꿈을 뒷바라지 하고 있지만 그가 나중에 어떤 길을 가든, 아버지와 그라운드를 누볐던 추억은 평생을 갈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하는 이런 기억들은 힘이 세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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