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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칼럼] 8.15에 생각하는 한일관계

2019-08-08 (목) 우남수 목사 / 행복연구원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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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36년간의 긴 억압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광복절’이다. 그런데 역사를 더듬어 보면 요즈음 북미간에 논쟁의 중심에 있는 핵(核 )이 우리의 해방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45년 7월 26일 미,영,중화민국,소련 4개국 정상이 독일의 포츠담에서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다. 만약 항복하지 않을 경우 일본은 완전히 파멸할 것을 경고했었다. 승리에 도취되어 의기 충천했던 일본은 이 선언을 묵살해 버렸다. 그 결과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의 비극을 연출했다.

미국이 그 다음달(8월)인 6일 히로시마에, 9일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했던 것이다.

한수산의 장편소설 ‘군함도’에는 그때의 참상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8월 6일 아침 출근 시간에 B-29가 히로시마 상공에 출현했다. 시람들은 하도 많은 전투기가 떴었기 때문에 또 한 대가 떴구나 생각하고 무신경 하였다. 그때 비행기는 하늘에서 무언가 커다란 물체를 떨어 뜨렸다.


‘리틀보이’라고 명명한 원자폭탄이었다. 순식간에 지근 거리에서 그 빛을 본 사람들은 눈이 멀어 버렸고, 더 가까이 있던 14만여명 사람들은 4천도가 되는 열에 순간적으로 증발해 버렸다.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이후 즉시 항복을 선언하지 못한 것은 히로시마지역의 모든 사람이 다 죽어 피해 보고를 할 사람들이 다 없어졌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9일 나가사키에 또 다른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다음날인 10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두 손을 들었다.

그렇게 되어서 우리는 일본의 36년간의 압박과 착취 밑에서 해방되었고, 일본의 횡포도 끝을 맺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만끽할 기간은 너무 짧았다. 이북이 공산화 되고 6.25전쟁(1950)의 발발로 피비린내나는 동족상잔의 한국동란은 결국 한반도를 두 동강 낸채로 지금까지 아픔을 겪게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일본은 어부지리(漁父之利)식으로 이익을 챙겼고, 오죽하면 “한반도의 불행이 일본의 행복”이란 말까지 나왔을까?

그런데 그런대로 상부상조하며, 별 문제없이 유지되는 것 처럼 보였던 한,일관계가 최근 아베 정부의 한국에 대한 일본의 반도체 부품 수출금지 라는 갑작스런 경제 보복 때문에 충돌의 위기를 겪고 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문제의 출발점이 75년 전의 과거사라는 것이다. 우리 대법원이 일제 강점기 징용 피해자의 손해 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판결과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문제 삼아, 아베총리는 그것을 경제 보복과 연결시킨 것이다.

물론, 식민경향을 가졌던 지도자들의 잘못으로, 한국 정부가 제대로 처리 못한 실수의 후유증일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국민이 당한 피해를 감안할 때 일본은 더 깊은 사죄의 뜻을 표했어야 했다.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3.1운동때 대충 7천명이 사망했고 , 부상자는 4만 5천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일제 지배 36년간 착취당한 물자는 얼마나 많은가!

<우남수 목사 / 행복연구원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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