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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형제 우애경영, 50년 가까이 바둑판 시장 정상 지켜

2019-05-29 (수) 글·사진=허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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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주 육형제바둑, 가난이 싫어 무작정 상경한 큰형, 기원서 잡무 보다 바둑판과 인연

▶ 둘째 형이 동참하며 본격 사업, 때마침 바둑 열풍에다 품질 좋아, 밤낮으로 물건 찍어내며 승승장구

6형제 우애경영, 50년 가까이 바둑판 시장 정상 지켜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한 육형제바둑 본사 공장에서 25년 경력의 손경옥 생산팀장이 바둑판에 줄을 긋고 있다. 1개의 바둑판이 완성되기 위해선 170여번의 손질을 거쳐야 된다.

6형제 우애경영, 50년 가까이 바둑판 시장 정상 지켜

육형제바둑 창립 50주년인 2015년, 육형제들이 경기 남양주시 진천읍의 본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오른쪽부터 신완식(68), 신명식(66), 신병식(64), 신춘식(60), 신추식(57), 신우식(54)씨. <육형제바둑 제공>


6형제 우애경영, 50년 가까이 바둑판 시장 정상 지켜

목의 재질에 따라 바둑판의 가격과 질은 천차만별이다. 이 가운데 비자나무로 만든 바둑판은 최고급 제품으로 쳐준다. 육형제바둑에서 가장 고가인 1억짜리 바둑판은 1,000년 이상된 대만산 비자나무로 제작됐다. <허재경 기자>



16개 계란 꾸러미가 밑천의 전부였다. 엄했던 아버지 몰래 고향을 떠난 큰 아들에게 쥐어준 어머니의 마지막 노잣돈이었다. “농사꾼으로 살긴 싫다”며 무작정 서울로 향하면서 시작된 15세 소년의 타향살이는 주어진 운명처럼 보였다. “그 때만해도 다들 쌀밥 먹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워낙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큰 형의 고향 탈출도 이런 생활고에서 시작됐습니다.”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한 육형제바둑 본사에서 만난 신추식(57) 본부장은 54년 전, 본가인 전남 곡성에서 부모님의 반대에도 감행한 큰 형의 가출 배경을 이렇게 복기했다. 신 본부장의 큰 형은 육형제바둑의 창업자인 신완식(68) 전 대표로, 5명의 동생들과 함께 반세기 동안 국내 바둑판 시장을 이끌어왔다. 이 가운데 다섯 째인 신 본부장은 현재 육형제바둑의 안살림을 맡고 있다.


육형제바둑은 현재 80% 이상의 국내 바둑판 시장 점유율 1위 업체란 타이틀 보단 50년 넘게 이어온 ‘가족경영’으로 더 유명하다. 한우물 경영의 성공 비결에 대해 신 본부장에게 묻자,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다른 분들도 그 질문부터 합니다. 근데, 다른 건 없어요. 단지, 저희 형제들이 좀 끈끈하다고나 할까요. 일을 하면서 의견 차이는 있었지만 아무리 큰일이 닥쳤을 때도 형제들끼리 사이가 벌어진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롱런 중인 육형제바둑의 ‘우애경영’을 이해하기 위해선 196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한국 바둑계 대부와 만남

육형제바둑을 잉태시킨 신완식 전 대표와 바둑판의 인연은 우연에서 비롯됐다. 서울로 상경한 신 전 대표가 목공소를 운영했던 친척집에 머물면서 소개 받은 고 조남철(2006년 작고) 선생과의 만남이 계기였다. 조남철 선생은 1957~65년 국수전 9연패 등의 숱한 기록들을 쏟아냈고 1954년엔 한국기원까지 창설한 한국 바둑계 거목이다. 신 전 대표는 조남철 선생의 소개로 서울 명동의 송원기원에서 잡무를 보게 됐고 바둑판과 가까워졌다. 바둑판을 눈 여겨 본 당시 신 전 대표는 목공소에서 약 10년 동안 절치부심하며 바둑판 제작을 연구했다. 그 사이, 시골에서 둘째(신명식(66))가 올라왔고 1975년 급기야 ‘중앙바둑’(육형제바둑의 전신)이란 상호 등록과 함께 본격적인 바둑판 제작에 착수했다. 첫째와 둘째가 서울에 자리를 잡자, 남은 동생들도 고구마줄기처럼 잇따라 상경하면서 바둑판 제작에 동참했다.

‘품질’과 ‘신용’을 제품에 녹여낸 육형제바둑의 바둑판은 때마침 불었던 바둑 열풍과 함께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그 때는 지금처럼 여가 시간을 즐길만한 마땅한 오락기구도 없다 보니, 바둑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던 것 같았어요 전국 어느 기원에서나 육형제바둑의 바둑판을 사기 위해선 줄을 서야 했습니다. 밤낮으로 물건을 찍어내도 물량이 모자랐어요.” 신 본부장은 흐뭇했던 당시 상황이 떠오르는 듯 허공에 눈을 돌리면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불에 타고 물에 잠기고…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위기도 찾아왔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육형제바둑의 입지가 굳어갔던 1987년, 공장으로 운영됐던 서울 신내동 배 밭의 비닐하우스에 화재가 발생한 것. 바둑판의 생명인 원목을 포함해 전 재산은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허탈했지만 다시 일어서야 했고, 형제들은 그 동안 모았던 통장들을 내놓으면서 재기에 나섰다.

시련은 계속됐다. 화마의 상처가 치유되면서 다시 일어선 1998년, 이번엔 수해가 덮쳤다. 현재 본사로 터전을 잡은 남양주시 진천읍 인근의 광릉내 개천 상류의 골프장 둑이 터지면서 공장이 한 순간에 물에 잠겼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죠. 저희가 가진 재산이 나무인데 불에 타고 물에 잠기니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겠더라고요.” 신 본부장은 암담했던 21년 전 악몽에 긴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근데, 형님들은 그 와중에도 바둑판에 쓸만한 나무를 먼저 살펴보는 게 아니라 고객들의 외상 장부 먼저 챙겼습니다. 고객들과의 신용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된다고요.” 신 본부장은 덕분에 육형제바둑이 망하기 직전까지 내몰렸던 극한 상황 속에서도 주변의 도움으로 오늘날 국내 바둑판 시장에서 1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비가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육형제들은 어려움이 닥칠수록 더 똘똘 뭉쳤습니다.”

시간은 흘렀고 그 사이 육형제 가운데 3명은 현직에서 은퇴하고 넷째부터 막내가 주로 회사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신 본부장은 희망도 밝다고 했다. “3명의 형님이 물러난 대신, 4명의 조카들이 기특하게도 회사에 자발적으로 들어왔어요. 이제 조카들이 가족경영에 동참하겠다네요. 한시름 덜었어요. 육형제바둑의 기운을 이어갈 수 있게 됐으니까요.” 조카들까지 합류한 육형제바둑의 반상(盤上) 행마는 미래 진행형이다.
6형제 우애경영, 50년 가까이 바둑판 시장 정상 지켜


<글·사진=허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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