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곤죽되기 쉬운 까다로운 식재료, 소금 뿌려 두거나 한번 익혀서, 수분ㆍ공기 빼는 밑준비하면 달라져
▶ 마늘 볶아 간장 등에 버무려 먹고, 식초·올리브유 곁들이면 샐러드로, 강한 맛 재료나 향신료와 궁합‘딱’
가지에 비네그레트를 뿌리고 토마토, 허브, 치즈 등을 곁들이면 가지 샐러드가 된다.
이맘때쯤 가장 맛있는 가지는 다른 맛을 굉장히 잘 흡수하기 때문에 구이부터 튀김까지 웬만한 요리에 잘 어울린다
수분과 공기를 뺀 가지는 어떤 양념에 버무려도 맛있다
부글부글 끓는 냄비의 물 위로 스테인리스 국그릇이 아슬아슬하게 떠 있었다. 종종 끓는 물이 넘실거리다가 그릇으로도 흘러 들어갔다. 승객은 길이 방향으로 8등분한 가지였다. 찜기가 집에 자리잡기 이전의 시절, 가지는 그렇게 삶는 것도 찌는 것도 아닌 여정을 거쳐 극적으로 익어갔다. 최종 기착지는 언제나 나물이었다. 나는 그런 가지 나물을 좋아했다. 푹 익은 속살과 질깃함이 남아 있는 껍질의 조화가 재미있었다. 오히려 가지 자체보다 늘 씹히는 굵은 생마늘이 못마땅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그런 가지를 사람들은 대체로 싫어한다는 것을. 푹 익어버려 곤죽 같은 질감도 질감이지만 날것이라면 고운 미색이었을 속살이 푸르죽죽해져 입맛이 한층 더 떨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심지어 ‘푸르딩딩한 게 죽은 돌고래 속살 같다’라는 표현도 어디에선가 주워 듣고 너무 좋아서 책에 인용했었다. 튀김이 핵심인 어향가지가 동북식 중국집을 중심으로 퍼지면서 다른 요리 세계의 비교 대상도 생겼으니 그렇게 한식 속의 가지는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나물을 만들어 먹는 우리나 이렇게 가지를 미워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그네들만의 원래 이탈리아 요리인 가지 파르지미아노가 있다. 가지에 빵가루를 입혀 튀긴 뒤 토마토 소스와 리코타 치즈를 켜켜이 쌓아 오븐에 굽는 음식인데, 역시 음식의 이름을 결정할 만큼 대표 재료인 가지는 미움을 산다. 속살은 완전히 곤죽이 되어 버린 가운데 껍질은 오븐에서 질겨지도록 익어 버리니 둘이 아예 분리되어 버리거나, 속살이 질긴 껍질에 대롱대롱 매달려 다른 켜에 비해 잘 잘리지 않는다. 게다가 미국의 가지는 우리가 늘 먹는 것보다 좀 더 무섭게 생겼다. 멀쩡한 가지가 스테로이드 같은 걸 맞아 부풀어 오른 형국이랄까. 길이는 비슷하지만 4배 정도 굵으니, 길이 방향으로 갈라 나물을 만들어 먹기에도 부적합하다. 맛도 굳이 비교하자면 섬세함이 덜할뿐더러 조금 더 쓰고 떫다.
‘채소계의 스펀지’라 불리는 가지굵든 가늘든 조리는 만만치 않은데 흔하다. 물론 이맘때쯤 가장 맛있어지지만 한겨울에도 살 수 있는 채소가 가지이다. 게다가 껍질은 또 얼마나 반질반질하고 고운가. 칼이 딱 사뿐사뿐 들어가는 느낌마저 좋아서 왠지 하루 종일 가지만 썰고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조건반사처럼 별 생각 없이 사 들고 와서 도마에 올려 놓으면 그때 비로소 본격적인 고민이 밀려 온다. 대체 이걸 어떻게 먹는 게 좋을까?
정답은 ‘아무렇게나’이다. 가지는 다른 맛을 굉장히 잘 흡수하는 식재료이다. 그래서 나물부터 샐러드, 구이부터 튀김까지 웬만한 요리에 고개를 들이밀 수 있다. 눈치도 꽤 빨라서 이런저런 식재료와 두루두루 잘 어울린다. 말하자면 잠재력이 엄청난 채소인데 교육과 훈련이 좀 필요하다. 잠깐의 학습만으로도 잠재력이 활짝 피어나지만 배려해주지 않으면 거의 모든 음식을 완벽하게 망칠 수 있다. 전혀 과장을 보태지 않고 가지의 미래가 우리의 손에 달렸다.
가지는 왜 까다로운 식재료일까. 대부분의 과채류는 일단 수분이라는 ‘양날의 칼’ 격의 특성을 지닌다. 높은 수분 함유량 덕분에 특유의 싱싱함이며 질감 등이 가능하지만 맥락에 따라 다스리지 못하면 음식 전체를 망칠 수 있다. 가지도 예외는 아니어서 무게의 그대로 익혔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튀김이다. 앞에서 어향가지를 언급했는데, 인기를 누리는 메뉴이지만 정말 잘 하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수분까지 함께 튀긴 가지를 걸쭉한 소스에 볶아내니 최악의 경우에는 소스인지 튀김옷인지 가지인지 구분을 못할 뜨거운 곤죽이 식탁에 올라오고, 아니더라도 해물탕 속의 미더덕처럼 한 입 베어 물면 뜨거운 즙이 왈칵 쏟아져 나와 혀와 입천장을 데일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더군다나 수분이 전부가 아니다. 하루 종일 가지만 썰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은 특유의 사뿐 사뿐한 느낌은 조직의 공기 덕분이다. 사이사이 공기가 들어차 있는 가운데 조직이 느슨하게 얽혀 있으니 결국 가지는 ‘채소계의 스펀지’이다. 직접 확인도 해 볼 수 있다. 가지를 길이 반대 방향으로 두툼하게 한 쪽 썰어 무게를 달고, 식용유에 이십 분 담갔다가 꺼내 다시 무게를 달아본다. 원래 무게의 90% 정도는 가볍게 기름을 머금을 것이다. 이런 가지를 그냥 튀긴다면? 언젠가 건대입구의 양꼬치집에서 먹은 것처럼 한 입 베어 물면 뜨거운 조미료맛 즙을 쭉 내뿜는 괴물이 되어 버린다.
가지를 적정한 두께로 둥글게 썰어 부침가루나 튀김가루로 옷을 입혀 부쳐 먹는 가지전도 별미이다.
가지의 수분과 공기를 잡으려면그래서 가지의 수분과 공기를 덜어내는 ‘선행학습’이 필요하다. 첫 번째 방식은 소금만으로 가능하다. 쓰임새에 맞게 썬 가지를 체에 받치고 소금을 솔솔, 넉넉히 뿌려 두 손으로 가볍게 버무려 30분 가량 둔다. 삼투압으로 느슨하게 얽혀 있던 조직에서 수분이 빠지니 눌러 공기를 빼낼 수 있다. 종이 행주를 덮고 가볍게 손바닥으로 눌러주면 수분과 공기가 동시에 빠져 나온다. 워낙 염장과 나물에 익숙한 우리이니만큼 가지 절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이다.
다만 이 방법은 간단한 만큼 단점도 지닌다. 시간이 좀 걸리니 기다려야 할뿐더러 수분과 공기는 걷어냈지만 날 것이므로 어떻게든 한 번 익혀야 먹을 수 있다. 이후의 과정까지 고려한다면 가지 한 가지 요리하는데 넉넉잡아 1시간은 걸린다. 좀 더 편하고 빠른 방법은 없을까. 부피가 크니 공간을 많이 잡아 먹지만 밥을 비롯한 찬 음식을 데우는 데나 쓰는 전자레인지가 가지의 선행학습 전담 교사 노릇을 톡톡히 할 수 있다. ‘마이크로웨이브(극초단파)’라는 명칭이 말해주듯 전자레인지는 극초단파로 식재료 속 물 분자를 정렬 및 재정렬 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운동에너지로 열을 발생시켜 가열시킨다. 따라서 가지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익히는 한 편 적당한 압력을 가하면 수분과 공기를 동시에 뺄 수 있다.
일단 가지를 필요한 두께로 썬다. 속살을 껍질이 일정하게 둘러싸는 형국이니 길이 반대 방향으로, 즉 둥글게 써는 게 가장 좋다. 소금과 후추를 솔솔 뿌려 간한다. 전자레인지의 내부 공간에 맞는 접시를 준비해 종이 행주를 두 장 깔고 가지를 일정하게 담은 뒤, 종이 행주 두 장을 올리고 같은 크기의 접시로 덮는다. 접시는 무거울 수록 좋다. 전자레인지에 3~5분 돌린 뒤 꺼내(접시가 뜨거우니 주의한다), 새 종이 행주 두 장 사이에 넣어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러 남은 수분과 공기를 함께 뺀다. 한국에서는 대체로 데치거나 삶은 채소 혹은 나물류의 물기를 뺄 때 두 손 사이에 둥글게 뭉쳐 넣어 짜는데, 그럼 안으로 들어갈수록 물기가 빠지지 않고 압력을 지나치게 가해 연약한 채소가 물크러진다. 따라서 한 켜씩 펼쳐 놓고 종이 행주를 올려 물기를 빨아들이는 게 좋다. 한꺼번에 많이 손질하고 싶다면 ‘접시-종이행주-가지-종이행주-접시’의 켜를 여러 개 쌓아 올린 뒤 전자레인지에 한꺼번에 돌리면 된다.
가지가지 해먹는 가지 요리이렇게 선행학습, 또는 요리 세계의 용어로 ‘밑준비’가 끝났다. 가지의 눈치가 빨라진데다가 한 번 다 익기까지 했으니 정말 가지가지의 가지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다. 일단 지금까지 곤죽의 서러운 팔자를 떨칠 수 없었던 한식에서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자. 참기름에 소금이든 간장이든 심지어 된장이든, 어떤 바탕의 양념으로 버무려 먹어도 맛있다. 다만 마늘은 볶아서 매운맛은 빼고 단맛은 살려 주는 게 맛도 맛이지만 적당히 부드러워진 가지의 속살과 더 잘 어울린다. 혹 마늘강국의 국민으로서 생마늘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신념을 굳게 지켜야 한다면 미리 다져 간장이나 식초 등에 담가 특유의 맵고 아린 맛을 살짝 빼줄 것을 권한다. 생강도 가지와 아주 잘 어울리는데 다져 더하면 씹히는 질감도 나쁘고 쓴맛도 두드러지므로 강판에 곱게 갈아 즙만 더한다. 한편 날씨가 본격적으로 더워졌으니 가지 냉국도 좋다. 대부분의 레시피에서 채택하는, 물러지도록 삶거나 뭉쳐서 물기를 뺀 가지보다 훨씬 가벼우니 사과식초 등으로 상큼함을 낸 국물과 잘 어우러진다.
한식 나물 식재료로서 가지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면 바로 서양 요리의 세계로 발을 들일 수 있다. 양념장을 비네그레트(식초 등 산과 올리브기름 등 액체 지방의 조합)로 대체하면 샐러드가 된다. 맛과 향, 질감의 차원에서 여러 갈래의 가능성이 있다. 일단 다른 맛과 향을 잘 받아 들이는 매개체로서 주로 강한 맛의 식재료 및 향신료와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낸다. 전자로는 안초비(없다면 액젓), 올리브, 치즈와 토마토, 후자로는 커민, 너트멕 등이 대표적인 짝이다. 한편 치즈는 동물의 젖으로 만들어 매끄럽고 풍성한 질감도 함께 더해주니, 가장 순한 맛인 리코타나 크림치즈부터 양이나 염소젖으로 만드는 페타처럼 강렬한 맛의 것들과 다른 표정으로 두루두루 잘 어울린다. 치즈가 지닌 고소한 맛의 여운을 이어주고 싶다면 호두를 더하면 좋고 매끄러움과 풍성함, 그리고 감칠맛을 엮어주고 싶다면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건조 숙성시킨 프로슈토가 가지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샐러드뿐만 아니라 볶음이나 구이, 튀김도 좋다. 낮 최고 기온이 30도에 이르는 등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 드는 시점에 눈치 빠른 가지 한 가지쯤 손에 쥐고 있으면 든든하다.
푹 익힌 가지 속살만 발라 내 양념한‘바바 가누쉬’도 별미사실은 곤죽이 된 가지 속살에게도 나름의 의미 있는 입지가 있다. 우리의 가지나물과 차이가 있다면 껍질은 과감하게 버린다는 점이다. 아예 푹 익어버린 속살의 부드러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따로 발라내 요리한다.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 시리아, 이집트를 비롯한 레반트 지역의 ‘딥(dipㆍ빵 등을 찍어 먹는 양념)’인 바바 가누쉬이다. 만들기도 무척 쉽다. 가지를 완전히 푹 익혀 속살만 발라내 식힌 뒤 마늘, 레몬즙, 올리브기름, 후추 및 고춧가루 등을 더해 잘 섞는다. 가지 나물에는 볶은 마늘을 권했지만 바바 가누쉬에는 생마늘을 써야 그 강렬한 맛이 신 레몬즙과 균형을 맞춘다. ‘손맛’을 내고 싶다면 김치를 담글 때처럼 절구에 마늘과 레몬즙 등의 맛내기 재료를 빻아서 더할 수도 있다. 어떻게든 속살만 푹 익혀서 껍질과 분리시키면 되지만 어향가지 같은 음식이 인기를 얻듯 사실 가지는 ‘불맛’도 아주 잘 흡수하는 식재료이다. 따라서 그릴 등에 껍질을 새까맣게 태운다는 느낌으로 구워 바바 가누쉬를 만들면 한결 더 맛있다. 지방을 쓰지 않은 식사빵이나 납작빵, 칩 등에 듬뿍 묻혀서 먹으면 그게 바로 여름의 맛이다.
<
이용재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