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꽃이 보이다

2019-05-09 (목) 12:00:00 김영숙(실리콘밸리한국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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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을 들이기 무섭게 죽어 나가는 ‘마이너스의 손’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중의 한명! 식물이 죽는 이유는 물 부족뿐만 아니라 과습, 온도, 상처, 배수 불량, 영양실조, 해충, 저온 화상 등 다양했다. 화분에 심은 식물은 스스로 살아갈 수 없으므로 물도 주고 통풍도 시켜주고 영양제도 주고 분갈이도 때맞춰 해줘야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깨지면 식물은 죽게 되는 것이다. 이사온 지 일년 남짓, 선물로 받은 화분들과 맘먹고 산 화분들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남은 화분은 부끄럽지만 하나도 없다.

몇 주전 어느 날, 무심결에 바라본 정원에 노오란 꽃이 보였다. 심은 적이 없는 꽃이라 궁금해서 살펴보았다. 너무도 예쁜 노란 수선화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분홍색의 작은 꽃들도 주위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이사와서 선물받은 두 개의 과일나무에도 움이 트고 싹이 돋기 시작했다. 죽은 화분을 버린 곳에서는 하얗고 어여쁜 카라도 피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런 도움을 준 것이 없는데, 스스로 피어난 꽃들이 신의 선물처럼 느껴져 그저 신기하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자연과 주변에 무관심하게 살아온 내게 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큰 변화였다. 그날, 당장 정원용 가위 하나를 사서 반나절 동안 정원을 손질하느라 바쁘게 보냈다.

내가 관심을 못 가진 것은 비단 꽃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자주 전화하시는 친정엄마의 하소연도 가끔은 뒤로 하고 시댁의 안부 전화도 자주 거른 채 나는 그렇게 일과 바쁘다는 핑계로 마음의 여유도 없이 살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는 남편의 지치고 피곤함을 돌볼 겨를도, 학교 공부로 바쁜 아이들의 건강과 성장을 제대로 챙겨줄 여유도 없이, 자주 못 보는 친구들의 안부도 신경 못쓴 채 바쁘게 살아왔다. 때론 거절 못해서 안해도 될 의미없는 일에 며칠씩 에너지를 소모하고, 직장일에 얽매여서 시간을 저당잡히고 살고 있었다.

오늘, 꽃이 보인다. 40대 중반의 어느 봄날, 내 인생에 꽃이 보이기 시작한다. 꽃과 더불어 꽃보다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며칠 전에는 아는 분께 다육식물로 화분 만드는 법을 배웠다. 이 화분이 나의 사랑으로 오래오래 함께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꽃을 가꾸듯이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의 시간도 넉넉히 내어주고 함께 위로하면서 살고 싶다. 이제는 꽃이 보인다.

<김영숙(실리콘밸리한국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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