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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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있는 나, 헌 옷을 입다…그녀는 빈티지스트

2019-05-01 (수) 심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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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지나가다 우연히 들어간 세컨핸즈(second-hands) 빈티지숍(vintage shop).
서래마을 한 켠에 자리한 간판도 보이지 않는 이 숍은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 오라는
것인지 밖에서 볼 땐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윈도우에 걸려있는 옷들을 보면 분명
새 옷은 아니었어요. 들어가자마자 마치 영화 ‘나니아 연대기’처럼 옷장 속 깊은
곳에 숨은 다른 세계가 등장했습니다. 3층이나 되는 이 숍은 수 백 가지인지 수 천
가지인지 숫자를 가늠할 수 없는 옷가지와 가방, 구두, 소품이 각자의 스토리를
간직한 채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친환경’이 생존을 위한 화두가 되면서 패션업계에서는
중고패션 일명 빈티지패션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최신 유행하는 옷을 빠르게 만들어
판매하는 패스트패션 브랜드의 대표주자 스웨덴의 H&M 그룹이 중고 의류 판매에
나서 패션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데요. 2년 전부터 폐기물을 재활용한 콜렉션을
선보이던 H&M 그룹이 이제는 중고 의류 판매 플랫폼 ‘셀피’와 손잡고 자매 브랜드
‘앤아더스토리즈’의 스웨덴 웹사이트에 ‘pre-loved(사랑 받았던)’라는 코너를
선보였죠.

◇ 의식 있는 빈티지 패셔니스타 늘어난다=H&M의 돌발 행보는 요즘 전세계 소비자들이 빠른 패션 대신 환경에 도움이 되는 패션을 선호하는 트렌드로 급변하는 것과 궤를 함께 합니다. 엘렌맥아더 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패스트 패션이 인기를 끈 지난 15년 간 의류 생산량은 2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옷을 입는 기간이 줄었고 버리는 옷도 늘었죠. 버려지는 옷의 85%는 매립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산업으로 패션사업이 꼽히는 이유죠.


요즘 젊은 층은 카페나 의류 매장에 가서도 “이거 재활용 되나요?”를 묻는다고 합니다. 갈수록 환경이 심각해지니 미래에 건강하게 살아남기 위해서 옷 한 벌을 입고 차 한잔을 마셔도 환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해외에서는 젊은 층 사이에 ‘중고 의류를 입는다=나 의식 있다’는 등식이 형성되고 있답니다. 얼마 전에는 18~25세 여성 4명 중 1명이 패션 구매를 중단하겠다고 했고, 50%는 중고 제품을 살 의향이 있다는 미국 온라인 중고패션 업체 ‘스레드업(thredUP)의 설문조사도 발표된 바 있지요.

스레드업은 ‘3년 후면 중고 패션 시장이 럭셔리 패션 시장을 압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습니다. 2017년 3,600만 달러(404조원) 규모였던 전세계 중고패션 시장은 2022년이 되면 약 4,000억 달러(449조원)까지 치솟을 것이라고 하네요.이 시기 전세계 럭셔리 패션 시장 규모가 3,050억 달러(342조원)로 하는군요. 간호섭 홍익대 패션디자인학과 교수는 “중고 패션 시장 규모가 커지고 있는 이유는 환경에 대한 연대와 책임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 ‘빈트로’를 모르면 Z세대 힙스터가 아니다=국내에서도 Z세대와 밀레니얼 힙스터들 사이에 빈티지가 대세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수진 이노션월드와이드의 데이터코멘트팀장은 “요즘 젊은 층은 고풍스러운 레트로풍의 아이템을 선호하는 것을 넘어 중고 패션을 여러 개 섞어 새로운 경험과 개성을 추구한다”고 귀띔합니다. ‘나 혼자 산다’에서 손담비, 정려원 등이 구제패션의 성지 동묘시장을 즐겨 찾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묘와 광장시장은 젊은 층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고 하네요. 그러나 아직까지 대다수 한국 젊은 층의 빈티지 패션은 중고 제품을 사다가 입는 것이 아니라 1980년~1990년대 기성세대가 입었던 복고풍의 느낌을 재현하는 식입니다. 손담비와 정려원이 두 사람도 거뜬히 들어갈 것 같은 헐렁한 셔츠와 티, 재킷을 레이어드한 것을 보고 그들은 ‘힙하다’고 표현하는 거죠. 10~30대에 유행 중인 복고룩은 ‘딘드밀리룩’과 ‘빅로고’ ‘아노락’으로 정리됩니다. ‘키드밀리’와 ‘딘’을 합친 딘드밀리룩은 목이 다 늘어난 허름한 티셔츠에 헐렁한 셔츠, 포인트를 주는 박시한 재킷을 레이어드해 오버핏을 연출합니다. 촌스러움으로 인식됐던 브랜드 빅로고 아이템이 새로운 멋으로 통하고요, ‘아재패션’의 시그니처인 아웃도어의 바람막이 재킷이 ‘잇템’으로 등극했습니다.

◇ 빈티지 쇼핑, 유일함의 가치 찾기와 시공간을 뛰어넘는 재미=지난 주말 다시 찾은 빈티지숍에서 저는 일본에서 건너왔다는 10년 된 크리스챤 디올의 가방과 주인장이 10년 전에 이태리에서 직접 샀다는 크로스 미니 백, 일본산 꼼데가르송 셔츠를 건져 왔습니다.

보물찾기 놀이와도 같은 빈티지숍 쇼핑은 여러 가지 매력이 있었습니다. 운 좋으면 주인의 변심에서 시장에 나온 신제품 수준의 제품을 득템할 수도 있고 일단 가격적인 면에서 편안한 마음을 갖고 쇼핑을 즐길 수 있답니다. 여유롭고 고요한 공간에서 나만을 위한 보물을 건져내는 일은 힐링의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빈티지 쇼핑을 즐기는 빈티지스트들은 사실 ‘유일한 것’에 가치를 두며 빈티지 제품을 세월에 흔적을 나만의 멋으로 승화시키는 아이템으로 변신시킵니다. 중고패션 아이템을 사는 것은 이전 사용자가 제품과 함께 보낸 추억과 보이지 않는 스토리를 상상하고 공유하는 것이지요.

도산공원에서 ‘라탈랑트’라는 빈티지숍을 운영 중인 지향미 대표는 “빈티지 제품에는 스토리와 역사, 헤리티지가 있고 개인의 러브스토리와 인생이 담겼다”며 “과거의 주인과 지금 내가 물건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시공간을 뛰어넘는 재미도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 나라 밖은 플리마켓 천국=한국에는 이제 복고 트렌드로 중고 패션이 주목받지만 해외는 일찌감치 중고시장이 발달해 있습니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나카메구로, 에비수, 다이칸야마역 부근에 빈티지숍이 몰려 있죠. 니스, 생폴드방스, 몬테카를로 등 남프랑스는 어디를 가도 빈티지숍을 마주칩니다. 전세계 빈티지스트들이라면 알 만한 ‘릴 쉬르 라 소르그’는 호텔부터 집, 카페까지 도시 자체가 벼룩시장이에요. 유럽에서 최대 규모의 빈티지마켓인 암스테르담의 ‘델프트마켓’과 얼마 전 문을 연 스페인의 ‘빈티로지’도 도시를 의미있게 만들죠. 지향미 대표는 “외국인들이 빈티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남을 의식하지 않고 절약정신이 몸에 뱄기 때문”이라며 “하이엔드 명품을 즐기는 케이트모스도 대표적인 빈티지스트”라고 전합니다.

<심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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