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겨울을 내 생애의 가장 추운 겨울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지라도 무료해서 지극히 권태롭고 밋밋한 겨울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4월이 되었다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도 손에는 외투를 챙겨 들고 나가며 ‘봄이 어디쯤에서 늑장을 부리고 있는 걸까…’ 혼자말로 불평을 잊지 않는다.
SNS에서는 무너진 빈 집 축대 위에도, 높은 빌딩의 그늘진 모퉁이 틈새에서도 기적처럼 꽃이 피어났음을 알리고 있지만, 내가 사는 동네는 여전히 아침저녁으로 계절을 뒷걸음치게 하는 차가운 공기가 숨어든다.
주말마다 내리는 비가 ‘꽃 비’이기를 기대하면서도 모처럼 맑게 개인하늘이 반갑다. 천천히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마주하는 눈 익은 풍경을 스마트 폰에 담는다. 비가 지나간 자리마다 새순이 돋고, 4월의 햇살이 눈부시다. 서두를 일이 없는 탓에 자동차로 10분 남짓한 거리를 천천히 걷기로 한다. 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 편의점에 들어가 아내가 부탁한 커피와 식빵을 사 들고 다시 느린 걸음으로 되돌아 왔다. 걷다 보니 감정을 다치지 않기 위해 애썼던 순간으로 부터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가쁜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 호흡에 집중하고, 눈앞에 보이는 소박한 풍경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를 제어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나이 듦에 감사한다.
자주 잊고 살았던 이웃집 노부부가 잔디를 정리하다 말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짙게 패인 주름에서 가족을 보살피며 살아 내느라 빠듯했을 지난날들이 짐작되었다. 간단한 근황을 주고받으며 세월에 단련된 너그러움을 나누는 그들과 이웃 이상의 연대를 느꼈다.
앞뜰에 나가 꽃대 올린 수선화를 마중한다. 지난해 태풍에 쓰러져 베어 낸 앞뜰의 벚나무 묵은 밑 둥에서도 새 순을 내민다. 해마다 환하게 앞마당을 밝히던 벚꽃은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언젠가 다시 꽃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어 본다. 서둘러 피었다가 순식간에 꽃잎을 내려놓은 목련 꽃이 피었던 빈 자리에 다시 올 찰나의 봄을 기다리며 어린잎이 고개를 내밀었다. 한 발자국 먼저 다녀간 사람과 다음에 올 사람의 사이를 내가 살아가는 것처럼, 앞서 간 꽃잎과 뒤에 올 꽃잎 사이에 빈 나무가 서 있었다. 조금 이르게 피어낸 생명과 새로이 움트는 생명, 그리고 그 사이에 그저 서 있는 생명은 비록 서로 다른 이름 일지라도 전혀 낯설지 않은 관계임을 알겠다.
한껏 부풀었다가 조용히 사그라져가는 봄꽃에게서 문득 느끼는 애처로움을 애써 모른 척 하기로 한다. 그래서 봄은 사소함의 민낯인지도 모르겠다. 비바람이 불면 오늘 눈부셨던 꽃잎도 자취를 감출 것이다. 시간은 순리대로 흘러가겠지만 꽃을 제대로 보기 전에 이 계절이 이렇게 덧없이 가버린다는 사실이 못내 서운하기조차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향기에 취하고 꽃구름에 환호하고, 꽃비에 넋을 빼앗긴다. 역시 봄에게는 마음을 열어주지 말아야 했었을까?
해질녘이 되어야 모든 자연이 본래의 색으로 보인다고 했다. 시인 안치환의 노래처럼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이 그리운 봄이다. 돌이켜 보면 나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며 짧은 봄, 그 꽃 시절을 함께 누린 그들이 ‘꽃’ 보다 아름다운 참 ‘벗’이었다.
봄날은 간다. 그리고 다시 그 봄날은 올 것이다. 그 사소함을 알면서도 화사한 봄빛을 보지 못한 채 빛을 잃은 꽃에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쩌면 내 봄 날과 닮아 있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부활절 아침에도 비가 내렸다. 늘 다니던 근처의 마켓에는 파업 피켓을 든 사람들이 비속에서 빈 광장을 지켜내고 있었다. 일주일을 넘어선 파업에 일상의 불편함과 약간의 피로감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들의 외침이 외로운 절규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비록 그들의 외침이 어느 봄날에 허망하게 떨어진 꽃잎처럼 기억할 수 없게 될 지라도 그 꽃잎은 다시 그 자리에서 다시 필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부활의 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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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