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구자 서재필이 꿈꾸는 나라

2019-04-23 (화) 정재현/칼럼니스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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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13일부터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 박사의 주도로 제1차 코리아독립회의가 개최되어서 150여 명의 동포들과 미국인 친구들이 모여서 대회를 열었었다. 올해 그 100주년을 기념하여 서재필기념사업회 주관으로 같은 날자에 3일간 행사가 진행되었다. 한미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기념식을 비롯하여 대학생들을 위한 역사교실, 청소년리더십교육, 음악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연일 진행되었다. 특히 취타대가 선도하고 한글학교 학생 500여명 등 1300여명이 참석한 시가행진은 연도의 주민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한인2세 청소년들이 많이 참석한 것은 큰 보람으로 이민 생활과 한미우호에 미래가 밝다는 예감이다.

선구자 서재필 박사는 18세에 과거에 급제했고, 20세 되던 1884년에 김옥균, 박영효, 윤치호 등과 개화파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3일만에 실패한다.

주모자들은 급히 일본으로 도피하였으나, 무관으로 혁명정부의 병조판서를 맡았던 서재필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와 처자를 포함한 일가 친족이 사형 혹은 음독자살로 몰살하는 비극을 당한다.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후원자를 만나서 펜실베니아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영어, 역사, 민주주의 사상을 배웠다. 그는 현 조지 워싱턴대학교 야간학부에서 공부하여 1892년 한인최초로 미국 의사(MD)가 된다. 그는 1890년 한인 최초로 미국시민권을 취득했다.


1895년 워싱턴을 방문한 박영효로 부터 조선에 정치적 변화로 민비 정권이 몰락하고 개화파가 집권하게 되었으니 개혁을 도와달라는 권유를 받고 10년 만에 귀국한다. 관직을 사양하고 중추원 고문으로 총리의 준한 권한을 같게 되었으나, 미국에서 기독교 신자가 된 그는 가족의 복수를 하지 않는다. 그는 1896년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논설을 통해 민권과 평등, 산업과 공중보건, 악습폐지 등 민주주의를 교육했다. 1897년 조선의 국권을 압박하던 열강으로부터 주권을 상징하는 독립문을 건립했고, 이어서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인재를 발굴하고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를 전개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열강들은 조정을 압박하여 1898년 서재필을 미국으로 다시 추방한다.

미국에 돌아온 그는 1919년 삼일만세운동과 임정수립에 호응하여 미국 전역에 20개 지부를 두고 200회 이상 강연회를 개최했으며, 매가진 ‘한국평론’을 발행하여 각 대학에 보내어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주장 했다. 이 일로 인하여 사업으로 번 개인재산을 전부 소모하고 파산선고를 하기에 이른다. 그를 앞장서서 도와주었던 ‘한국친우회’ 회장 F. 톰킨스 목사가 한국독립박물관 홍선표 박사의 발굴에 의하여, 이번 행사에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그 후손에게 수여되었다.

미국에서 의사로 복직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계속 지원하던 그는1947년 미군정 최고고문으로 귀국하여 조국을 위하여 마지막 봉사를 한다. 1948년 남북 분단 정부가 각각 수립될 무렵 미국으로 돌아 온 그는 1949년 삼일운동 30주년 방송녹음으로 남북이 통일되어야 비로서 완전한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고 메세지를 남긴다. 결국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큰 충격을 받고 1951년 87세로 사망한다. 천안독립기념관에는 그의 마지막 메세지가 돌비에 새겨져 있다. “합하면 조선이 살테고, 만일 나뉘면 조선이 없어질 것이오..살 도리들을 하시오” 라고.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꿈은 아직 이루어 지지 않았다. 우리 세대에 꼭 이루어야 할 서재필의 유지이다.

<정재현/칼럼니스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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