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명대로 살다가는 삶이라면

2019-04-06 (토) 김명욱/객원논설위원
크게 작게
사람의 삶이란 참으로 알 수 없다. 태어나 살다 죽는 건 다 같다. 그러나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어도 죽을 때는 순서가 없다. 수명을 다하여 죽는 건 큰 복이다. 그것도 건강하게 살다가. 하지만 한창 살아야 할 나이에 명을 달리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불행이다. 본인은 이미 명을 달리해 세상을 떠난 상태니 모른다.

남아 있는 가족들. 얼마나 슬픈가. 특히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심정. 온 몸과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을 거다. 그러니 자식이 건강히 살아가는 것도 효도에 속하지 않을까. 비록 부모를 잘 모시지 못한다 해도. 항상 자식 잘되기를 염원하는 부모의 심정. 부모에게 용돈 잘 드리지 못하나 건강히 살아만 가도 효도하는 거다.

얼마 전 53세에 세상을 떠난 이의 장례예배에 참석했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고 미국서 공부했다. 뛰어난 학업성적을 바탕으로 좋은 회사에 들어갔다. 능력과 대인관계가 좋아 그는 세계적인 기업의 파트너까지 되었다. 건강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쓰러진 거다.


뇌사상태에 빠졌던 그는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명을 달리했다. 장례예배의 분위기. 남동생과 여동생이 나와서 형과 오빠와의 추억을 추모했다. 맏아들을 잃은 엄마. 내내 눈물을 흘리며 장례예배의 손님과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본다. 아버지는 오히려 담담하다. 그래도 그의 속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있을 것 같다.

이 부모들을, 가족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아들이 하늘나라에 가 있으니 안심하라고 해야 하나. 아니다. 말이 필요 없다. 무슨 말로도 위로는 될 수 없다. 세월이 그들을 안심시키기 전에는. 다행히도 그들은 종교가 있고 신앙이 있다. 신앙과 믿음 안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으나 100%는 아닐 거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30년 가깝게 교우의 정을 나누는 한 부부. 2001년,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릴 때 작은 아들을 잃었다. 그 심정 어떻게 알랴. 하늘이 무너지고 청천벽력이 내리치는 것 같았을 거다. 아들이 하늘나라에 간지도 18년째. 아들의 엄마를 교회에서 만나면 꼭 안아준다. 그렇게 하기를 18년이다. 조금이라도 위로해주기 위해.

지금도 아들의 방을 그날 출근했던 그대로 놔두고 있는 부모의 마음. 금방 오늘이라도 “엄마” 하며 돌아올 것 같아 방을 치울 수가 없단다. 교회에서 만나, 교회에서 결혼하고 두 아들을 두었는데 한 아들을 잃은 이 부부. 아들의 아빠는 80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교회 성가대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찬양을 부른다.

하늘나라에 먼저 간, 아들을 위해 이들은 재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능하지만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오고 있다. 이미 수많은 학생들이 도움을 받았다. 또 앞으로 계속해 많은 학생들이 도움을 받을 거다. 그렇게 도움 받은 학생들이 사회에 나와 성공한다. 그럼 그들이 아들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거가 되겠지.

자식을 먼저 보내는 부모의 심정. 무엇으로도 위로 될 수 없다. 죽은 자를 살려 돌아오게 하기 전에는.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다만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너무 교만하지 말고 살아가는 것도 좋겠다. 특히 돈 많다고 자랑하지 말고. 돈 없다고 주눅 들지 말고. 돈. 죽음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다.

자식을 키우고 또 사회에 내 보내고 있는 부모들. 자식이 남 보다 더 뛰어나지 못하더라도. 자식이 부진하여 넉넉하게 살아가지 못해도. 자식이 이런저런 이유로 부모의 속을 썩인다 하더라도. 자식이 하는 것 마다 실패만 하더라도. 그들이 건강에 이상 없이 살아가고만 있다면 무조건 고마워하고 감사해야 하지 아닐까.

왜냐하면 살아 있는 자들이기에 그렇다.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 자식을 먼저 보내고 가슴에 파묻고 사는 부모들의 심정. 하늘이 위로해주고 감싸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삶이란 태어나면 반드시 한 번은 죽는 세상. 죽음에 그리 연연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수명대로 살다 가는 삶이라면 더 좋지 않을까.

<김명욱/객원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