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 관계가 좋으면 행복하다. 관계란 나와 너를 이어주는 다리역할에 해당된다. 어찌 보면 인생이란 수많은 관계 연속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관계를 벗어나 살 수는 없다. 관계는 형이하학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형이상학, 즉 인간과 신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죽도록 사랑하여 결혼하고 자식까지 둔 부부. 이혼 한다. 왜 이혼하나. 부부관계, 사랑의 관계, 희생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이혼했다 다시 결합한다.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었기에 가능하다. 이처럼 관계란 깨어지기도 하고 다시 회복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 번 이혼하여 관계가 깨어진 부부. 재결합 쉽지 않다.
관계가 지속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은 곧 신뢰다. 부부 사이의 믿음은 사랑의 초석이다. 부부 뿐만이 아니다. 믿음은 모든 관계 지속의 디딤돌이 된다. 친구 사이에도 신뢰가 깨어지면 관계가 어렵게 된다. 특히 현찰이 오고 가는 경제인들 간의 관계. 신용이 돈이다. 신용을 잃어버리면 좋은 관계는 무너져 버린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 은행과의 관계에서 믿음을 주지 못하면 돈을 빌릴 수 없다. 사업 확장에 필요한 자금. 그동안 쌓아왔던 신용평가에 의해 대출받을 수 있다. 신용이란 갚을 돈을 제때에 갚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 그냥 버는 게 아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를 중히 여겨 장사를 한 사람들이다.
형이상학에서의 관계성. 영적인 부분이요 신앙이 연관된다. 신앙은 또 종교와 관련된다. 특히 기독교신학의 경우.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예수는 태어난다. 예수는 공생에 3년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그리고 부활한다. 예수의 죽음은 깨어진 신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준다.
곧 다가오는 부활절. 부활의 의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성에 있다. 회복이 되게 한 것은 예수가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데 있다. 예수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이어준 다리 역할을 한 거다. 그래서 기독교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구원이란 하나님과 믿는 자와의 관계회복이다.
실존철학자 마틴 부버. 그는 <나와 너>란 책을 통해 참된 만남과 관계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러며 현대의 비극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의 상실에 있다고 한다. 그의 궁극적인 만남은 영원자(신)와의 만남에 있다. 신과의 만남과 관계는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과 관계의 비유일 수도 있다는 부버. 사람 속에서 신을 만나는 거다.
부버는 사람 사이가 나와 너가 아닌 나와 그것이 될 때 비극적인 관계가 된다고 한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아도 좋은 관계는 유지된다. 그런데 사람을, 그 안에 영원자, 곧 신의 속성을 지닌 인격체로 본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 세상은 존경과 존중, 섬김이 앞서는 진정 살만한 곳으로 바뀌지 않을까. 형이상학적인 만남이다.
행복이란 멀리 가서 찾을 필요가 없다. 아주 가까운데 행복은 있다. 우선 가정을 보자. 부부사이의 관계가 원만한가. 행복한 거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괜찮은가. 행복한 거다. 직장 동료와 상사와의 관계가 좋은가. 행복한 거다. 종교가 있듯 없든, 자신과 자신 안의 속사람과의 관계는 그럴듯하게 지나는가. 행복한 거다.
세상과 우리네 일생은 그물망처럼 얽혀져 이어져 있는 관계성 속에 있다. 만사가 다 연결돼 있다. 철학자요 수학자였던 알프레드 노스 와이트 헤드. 그는 유기체철학을 통해 만물을 살아있는 유기체의 관계로 보았다. 그러며 모든 게 과정 속에 있다고 한다. 변화와 발전 속에 서로가 연결돼 있는 관계가 세상이요 인간이다.
깨어진 관계인가. 회복하면 된다. 형이하학적 인간관계의 회복은 용서를 구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믿음을 저버리면 안 된다. 믿음과 신뢰는 관계지속 여건의 핵심이다. 형이상학적 만남과 관계지속의 중요성은 인간을 영적으로 풍요롭게 할 수 있다. 나와 너 속에 영원자의 속성도 있음을 보아야 한다. 관계가 좋으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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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