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역사적 진보주의자 이승만 초대 대통령

2019-03-27 (수) 정재현/칼럼니스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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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 20세기 대한민국의 위인 중에서 단 한 사람만 꼽으라고 한다면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비견될 만한 사람은 없다. 3월26일은 그의 탄생 14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현대사에서 잠시 잊혀 졌던 그가 요즈음 소셜 네트워크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한국의 정치 현안인 보수- 진보 논쟁의 타겟이 되어서 집중사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건국대통령 이승만기념사업회’ 는 당초 역사적 위인을 선양하는 문화단체로 10여년 전 조촐하게 건국대학교에 본부를 두고 시작 했다.

그런데 1948년 8월15일을 건국절로 정한 것이 오류였다. 그때부터 1950년 한국전쟁이 재발한 듯이 인터넷, 유투브 등에서 이승만-김일성 간의 사이버 전쟁이 불붙었다. 좌우대립의 격렬한 사이버 건국 전쟁은 좌파가 압도적으로 이기는 게임이 되고 만다. 이승만을 사랑하는 노인 그룹이 컴퓨터를 갖고 노는 젊은 세대에게 사이버 공간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은 당연한 일. 어설픈 향수의 ‘늙은’ 기념사업회는 ‘젊은 좌파’의 이승만을 비하하는 각종 반박 논리와 조작된 비방에도 제대로 방어 할 여지가 없었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중에 원군을 만났는데 촛불혁명으로 촉발된 대선 정국에서 진보파를 막기 위한 대항마로 보수파에서 이승만을 아이콘으로 선택한 것이다. '좌파 혁명'을 막기 위해서는 죽은 제갈공명이라도 불러내야 했다.

이승만은 몰락한 왕족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20살에 배재학당에 입학해서 새로운 정치체재 민주주의에 대하여 배운다. 서재필이 결성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윤치호 등과 같이 활동하고 만민공동회 연설을 통해서 민주주의 주체 새 나라 건설을 주장하다가 역적죄로 체포되어 종신형에 처해진다. 그는 감옥에서 영어성경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상재, 이준 등과 옥중에서 교류했다.

5년 만에 감옥에서 석방되어 특명을 받고 미국으로 가서 데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그러나 국운은 이미 기울었고, 그는 미국에 체류하며 정치외교학을 전공하여 프리스턴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하와이에 학교를 설립해서 동포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그는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고, 구미위원회 의장으로 워싱턴과 뉴욕에서 활동했다.

한국전쟁 후 자유당 시절에, 이미 80세가 넘어 노쇠했으나 주변의 무능한 간신들에 둘러쌓여서 독재자의 길은 간 것은 그의 생애 가장 큰 오류였다. 서구에서는 한 인물을 평할 때 ‘전기학 (Biographiologies) ’ 이라는 기준이 있다. 어느 한 시점만 보고 인물을 평가하면 편협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 인물의 평가는 그가 살아 온 역사를 배경과 객관적 시각으로 그가 살아온 전 생애를 통찰해야 하는 것이다. 풍운아 이승만은 절대로 보수주의자가 아니며, 탁월한 진보주의자로서 시대를 앞장서서 인도한 영웅이다.

<정재현/칼럼니스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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