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마리아와 유관순

2019-03-07 (목) 에스더 김/목사·미주한인여성목회자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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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은 크리스천의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이 어떠한 가를 보여준 자발적 무저항 애국운동이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천도교와 불교가 합하여 종단을 초월한 대한민국 독립운동이었다. 각계각층이 차별 없이 총궐기 했으며 해외동포들도 (미국, 일본, 간도, 중국, 연해주) 참가한 세계적 코리언 디아스포라 독립운동이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남성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여성들이 일어난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남성 중심적인 당시 사회분위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김마리아와 유관순 열사의 생애를 회고해 본다.

김마리아는 1892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에서 김윤방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부친이 세운 해서제일학교를 다녔고 소래교회와 학교와 가정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마리아는 정신여고 로이스 교장의 추천으로 1914년에 일본유학 길에 올랐다. 그리고 1915년 동경 유학 남학생들과 애국운동에 참여했다. 죠시가쿠인 여자학원 시절 미국인 교수 Miss London이 마리아가 꿈꾸는 민족독립운동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마리아와 황애시덕은 함께 연행했다가 석방된 후 마리아는 독립선언서를 밀송할 책임을 지고 2월 13일 조국을 향해 동경을 떠났다.

2월 15일 무사히 부산에 도착하여 큰 고모부 서병호와 작은 고모 순애를 만난 후 전국을 누비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오랜 감옥생활과 망명생활로 몸이 쇠약해져 1944년 3월 13일 53세로 하나님 나라로 갔다.

유관순은 1902년 3월 15일 류중권의 4남매 중 2녀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독실한 교인이었다. 고향은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이다.

이화학생들은 3.1절에 두 그룹으로 나뉘어 시위에 참여하기로 했는데 한 그룹은 탑골공원 뒷문으로 들어 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운동에 참가하기로 했으며 또 한 그룹은 상복을 입고 대한문 앞에서 곡하다가 만세 행렬에 합류하기로 했다. 유관순은 두 번째 그룹으로 서양 교사들이 교문을 막고 못 나가게 하자 5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다른 친구 10명과 함께 담을 넘어 남대문 방향으로 도망쳐 시위에 참석했다.

옥중에서 매일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여간수인 아마사끼에게 모진 매를 맞았다. 관순은 아마사끼의 모진 매와 아오내 만세운동 때 일본헌병의 칼에 찔린 상처에 고름이 계속 나온 것이 사망의 원인이었다.

<에스더 김/목사·미주한인여성목회자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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