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3.1운동인가, 3.1혁명인가

2019-03-07 (목) 정재현/칼럼니스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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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즈음 3.1운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 그 역사적 의의와 사상이 재평가 되고 있다. 과연 3.1운동이 민족전체의 호응을 받은 원동력이 되었던 사상적 배경과 힘은 무엇인가? 3.1운동은 1919년에 일시적으로 발생한 사건인가? 새 시대의 문을 연 ‘3.1혁명인가?

3.1독립만세운동은 역사상 전례 없이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역사적 ‘혁명(革命)’이었다.

첫째, 가장 특징적인 ‘비폭력 저항(nonviolent resistance)’은 일제의 국권침탈과 무단폭력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폭력을 배제하고 ‘독립만세’ 행진을 한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정치적 행동을 했다. 그후 20세기에 약소국들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비폭력 ‘무저항’이란 표기는 잘못된 표현이다.


둘째, 봉건왕조를 타파하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희구하는 정치적 혁명의 발현이었다. 고종의 국장을 계기로, 국권을 빼앗긴 무능한 왕조체제의 종식을 고하고 국권의 연속성을 기하여 새 시대의 조류에 따라 ‘민주주의 (democracy)’ 체제로의 독립을 선언한 혁명적 거사였다.

셋째, 일제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한일합방의 불법성과 무효를 주장하여 한민족의 정치적 독립정신의 발현이었다. 당시 강대국이 약소국을 강제로 식민지배하는 제국주의에 맞서고 미국 윌슨대통령이 한 촉구한 ‘민족자결주의( National self- determinatonism) 에 영향을 받은 최초의 민족적 표현이었다.

넷째, 평화주의(Pacifism)로 자주독립 의지를 표했다.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배타적인 방법이나 원한과 분노로 폭력행동을 하지 말고 질서 있게 의사표시를 행하라고 적시하고 있다. 지나칠 정도로 온건한 표현이라고 비난 받기도 했지만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민의 정당한 요구와 의지를 주장한 것이다.

다섯째, 평등사상(Equality)의 구현이다. 봉건 시대의 유물인 신분과 계급을 넘어서고 종교의 차별 없이 민족대표 33명이 작성 서명 했다. 이어진 전국적인 전개도 남녀노소 차별 없이 어린 학생들이 앞장서고 기생들도 한마음으로 참가했다. 계층 간의 구별 없이 평등한 인권 혁명이었다.

그 결과로 그해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어서 적극적인 독립을 위한 외교정치가 시작되었으며, 다른 한 편으로 평화적 방법을 실패로 판단하고, 역설적으로 무장 항일 활동을 적극으로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평양에서 소작농으로 기독교계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독립운동을 하던 김형직은 만세 직후 무력투쟁을 하기 위하여 온 가족을 인솔해서 1919년 만주로 이사 한다. 그의 처가 장로교 목사의 딸이 강반석(베드로)이고 동행한 그녀의 8살 난 아들이 만주에서 성장해서 후일 소련군 장교로 항일투쟁에 참가 한 김일성이다. 해방 후 북한 전역에서 기독교는 전면적 박해를 받게 된다.

올해 남한측에서 제안한 3.1운동 100주년기념 남북공동개최가 성사 될 수 없었던 역사적 배경이다.

<정재현/칼럼니스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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