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향기 속으로
2018-11-21 (수) 08:03:00
윤영순 우드스톡, MD
시월의 끝자락, 짙어가는 가을 정취를 만끽하기 위해 서둘러 여행을 떠났다. 해마다 봄, 가을 두 번의 나들이는 지금의 이 나이가 아니고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호강이다.
이번에도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 관람을 시작해 리하이 계곡 기차여행과 베어 마운틴 산행으로 스케줄이 잡혀있어 기대 반, 호기심 반, 떠나는 여행은 마치 맞선 보러 가는 처녀가슴마냥 설레었다. 여명을 깨우며 고만 고만한 시니어들과 함께 대형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일상을 떨치고 나왔다는 마음에서인지 짝궁과의 수다와 모처럼 오붓한 대화로 서로를 챙기는 부부만의 여유로움도 여행이 주는 흥분으로 버스 안은 벌써부터 부산스럽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가로수와 산등성이의 수풀림은 은은한 갈색 단풍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처음 도착한 리하이 골짜기에는 미 동부 최고의 단풍 명소답게 흐르는 계곡 사이로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동화 속 같은 짐. 쇼프(Jim Thorpe) 마을이 마치 몽블랑 산자락의 샤모니 같이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은 1700년대의 고전미를 지닌 채 조용히 숨쉬고 있는듯하다. 빛바랜 탄광촌을 개발하여 옛 것을 최대한 보존해 관광용으로 사용하는 기차가 특히 유명하다. 차표를 끊고 삐걱대는 낡은 의자에 앉아 있노라니 제복차림의 늙수구레한 승무원이 우리가 내미는 차표마다 찰깍, 찰깍 동그란 구멍을 찍어 주는데 마치 60년대 청량리 역에서 춘천행 완행열차를 타고 가는듯한 착각을 하게한다. 꼬불꼬불 기찻길을 따라 달려가는 계곡 옆 울창한 숲 속에는 잠자던 단풍 잎들이 햇살을 받아 기지개를 켜며 작별의 인사를 한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의 진미는 단연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키드’이다. “오즈의 마법사”란 이름으로 어린이들이 좋아 할 연극이리라 기대 없이 들어 갔는데 완전 반전이다. 무대 위의 화려한 배우들의 의상과 빠른 템포의 무대배경,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는 주인공들의 다채롭고 코믹한 연기와 어울려 우리를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게 하는 마력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관중들의 힘찬 박수가 끝나고서야 정신을 차릴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마침 오늘이 ‘위키드’ 공연 15주년 기념일이라 이벤트의 일환으로 검은 밤 하늘을 배경으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주인공의 얼굴 색을 형상화한 초록 물감으로 뒤덮여 경이로움을 더했다.
혼자서 낙엽을 밟으며 오롯이 감상에 젖어 보는 것도 젊은 날의 낭만이지만, 여러 지인들과 어울려 “하하, 호호” 웃음보따리 속에서의 가을 소풍이 지금의 우리 나이에는 더욱 절실하고 소중한 추억의 낭만 여행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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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우드스톡,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