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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칼럼] 그래서 어느 당을 찍을거예요?

2018-11-15 (목) 김문철 목사/ 천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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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공부 때다. 서로 대화를 나누던 중 한 분이 명절 가족모임 때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나누신다. “부모, 형제, 그리고 동서들이 모인 자리였는 데 어쩌다가 정치 이야기가 나왔어요. 시작은 좋았는 데 시간이 흐르면서 견해 차이로 언성이 높아지고 싸우기 일보직전까지 가는거예요. 이후 관계가 서먹해 져서 가족모임이 기다려지기 보다는 오히려 부담이 되요.”

교인들도 모이면 종종 정치 이야기로 달아오른다. 서로 의견이 맞으면 그 이상 신나는 일이 없다. 맞장구가 많아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의견 차이가 있으면 흥이 반감된다. 엇박자가 생겨 스트레스가 쌓이는 분위기다. 심하면 관계마저 서먹해진다. 그래서인지 한국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절대로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편가름의 위험 때문이다.

그렇다고 피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침묵만이 좋은 믿음일까? 기독교는 세상과 구별된 존재이지 세상과 격리된 존재는 아니다. 따라서 정치 이야기라고 못할 것 없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자기 의사 표시가 필요하다. 문제는 대화의 방식이다. 만일 대화가 “내 편 아니면 적이야” 와 같은 흑백논리로 간다면 슬픈 일이다.


한 때 김영삼,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장로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지지하라고 교회가 종용한 적이 있었다. 참 이유가 허접하다. 그런 논리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줄까? 종교적 이기주의나 집단 폭력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종교적 편향성으로 현실 정치의 실상을 분별치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이유도 내용도 없는 “묻지마 신뢰” “묻지마 찬성” 은 건강한 믿음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맹신과 독재에 가깝다.

성경에 보면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예수께 교묘한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이사(로마 황제) 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마 22:17) 물론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질문이다. 만일 바치는 것이 옳다고 대답하면 로마의 세금 착취때문에 고통받는 동족에게 매국노 취급을 당할 것이다. 반대로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대답하면 로마정부를 거역함으로 혁명당원으로 몰릴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예상 밖의 대답을 하신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 22:21)

무슨 말일까? 기독교인의 세계관을 정리해 주고 싶으신 것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가이사의 생명조차도 하나님의 것이다. 가이사가 세금으로 신자를 위협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역까지 침범할 수는 없다. 이 세상의 상황은 바뀐다. 하지만 변하는 상황때문에 영원한 가치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다. 현실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도록 강요할 수가 있다. 그로 인해 억울하게 착취 당하며 고난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믿음마져 바꿀 수는 없다. 우리의 주인은 본질적으로 가이사가 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 사는 것이 믿음이다.

정치적 대화 때에 우리의 주목할 것이 무엇이어 할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내 편이 아니면 적” 이라는 세계관이라면 슬프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편가르기” 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이다. 정치적 제도나 정책들이 과연 하나님의 성품 (은혜, 사랑, 진리) 를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지를 분별할 일이다. 물론 그 분별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최소한 맹종이나 맹신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주 미국 중간선거 직전 한 식당에서 정치 이야기로 달아오른 식탁의 한 낮선 분이 옆에 앉아 듣고 있던 내게 뜬금없이 물으셨다. “아저씨는 어느쪽이세요?” 잘하면 동지가 되고 잘못하면 적이 될 판이었다.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저는 건강보험등 인권에 관한한 민주당을 지지하지만 대북 정책은 공화당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러자 즉각 물으신다. “그래서 어느 당을 찍을거예요?”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글쎄요! 그 결정은 제가 알아서 할께요!”

<김문철 목사/ 천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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