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천고마비의 계절을 맞았다. 조석으로 떨어지는 온도는 옷깃을 여미게 하고 태풍, 홍수에다 총기난사로 수백 명의 인명피해에 이어 산불로 아수라장이 된 온통 세상이 뒤숭숭한 때다. 차분히 앉아 독서를 할 계제가 안 되는 때를 맞이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한국에서는 ‘TV 안보기 시민모임’이 발족해서 가족, 책, 운동과 가깝게 해주는 캠페인을 전개했었다. 어찌나 사람들의 책들을 안 읽고 TV나 다른 매체에만 모든 시간을 뺏기는 생활에 빠져있으면 이런 심각한 현실을 탈피하고자 모든 시민들이 나서서 강구책을 동원하고 또 계도하는데 전력을 다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다보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의학협회, 소아학회, 공중보건협회 등 미국 의학보건단체 10곳은 ‘인간이 깨어나서 하는 가장 정지된 행동이 가만히 앉아 TV를 보는 것’이라고 강조, 사람을 수동화 시켜 주체적 개인으로 설 수 있는 사고 능력을 마비시키고, 뇌와 몸을 움직이려 하지 않은 채 쏟아지는 전파의 흐름에 그저 내맡길 뿐이라고 그 위험성을 지거, 경고하고 있는 지 오래이다.
향엄(香嚴, ?~898)선사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20세기 전반 우리나라 최고의 독서가로 불렷던 최남선선생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내가 숱한 책들을 여러 수레분만큼 읽고 난 결론은 하나다. 그것은 남이 쓴 책은 절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라고 갈파하였는데 그렇다면 이제 향엄 선사의 일화를 들을 차례다.
향엄 선사는 9세기때 스님이다. 하루는 스승 되는 위산이 향엄에게 물었다.
“그대가 터득한 지식은 전부 듣고 본 것뿐이다. 지식에 대해선 묻지 않겠다. 그대가 태어나기 전, 동과 서를 구별하지 못했을 때의 그대 모습을 말해 보라.”
이에 향엄은 대답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한참 있다가 특유의 지식과 말 재주를 동원하여 몇 마디 했으나 모두가 엉터리였다. 향엄은 마침내 스승에게 도를 일러줄 것을 청하니, 위산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면 옳지 않다. 스스로가 일러야 그대의 안목이니라.” 하였다.
그 때 향엄은 방으로 돌아와 모든 서적을 두루 뒤졌으나 한 마리로 대답에 맞는 말이 없었다.
그 길로 그는 서적을 몽땅 태워 버렸다.
책을 태우는 것을 보고 달려온 학인(學人)이 자기에게 책을 달라고 했다. 향엄이 ‘내가 평생동안 이것 때문에 피해를 입었는데 그대가 또 피해자가 되려는가?“ 하였다고 하는 일화이다.
평생을 독서에 심취해서 배움의 길을 가신 분들도 얼마나 삶의 도를 깨우치기가 어려웠으면 위와같은 일화까지 전해 내려오는 가 싶다. 향엄 선사나 최남선 선생의 경지까지는 감히 비교를 할 수도 없는 바다. 차제에 우리도 과연 나는 독서를 하는 가 또한 신문을 구독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 제대로 알고 사는 가라고 한번쭘을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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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원 /뉴저지 하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