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다. 아무든지 누구든지 이런 풍경을 본다면 그 감회는 같을 듯 싶다. 이 앞에서 가던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 갈 만한 강심장은 없을 것 같은 엄청난 대형 무대
다. 그냥 자동차로 후딱 지나가기엔 뭔가 좀 건조한 것 같기도 하고 섭섭하리만큼 진한 풍경들이다.
구불구불 오르락 내리락 하는 동안 바뀌는 장면들은 마치 질문들은 좀 이따가 받겠다는듯 한데, 무대 위를 지나가는 바람이 훑어다 풍겨주는 해초냄새는 명확히 그 주제가 다르다.
해변을 따라 나그네들을 이끌고 가던 저녁 노을은 해지기 전에 볼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다 보아야할 게 아니냐는듯 마구잡이로 재촉해 가는데.여기는 남해. 그림 같은 남해를 내려다 보며 길 윗쪽 언덕에는 말로만 듣던 독일마을이 보인다. 짙은 감색지붕들이 다문다문 그림같다.
아 , 지금 그 안에선 무슨 얘기들이 살아가고 있을까? 숨막히는 경제건설을 꿈꾸며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유입하러 독일 뤼브케 대통령을 찾아갔
던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와의 눈물의 해후가, 그 피 같은 땀냄새가 아직도 그 마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대책없는 가난과 대면하느라 절대영원에 이주 해 살아야 했던 그들의 마을은 어쩜 다시 언덕아래로 내려올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아니, 내려오고 싶지 않은 것일까!
한참이나 머릿속에선 1960년대, 전후의 허기속에 여기저기 널부러져 버렸던 ‘가난’이라는 제목의 질문이 제멋대로 널을 뛴다.이렇게 풍요로운 세상에서 그 가난을 다시 꺼집어내다니, 생각이 엉기기 시작하니 갑자기 초친 맛이다. 공연히 스스로가 궁상스러워 지는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금방 내 안에서는 분명한 대답이 남해만큼이나 푸르게 , 고르지 않은 해풍에도 너그럽게 흔들리는 가로수 만큼이나 그럴싸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달리 대체할 수 없었던 가난이었기에 그들이 절대 영원에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을!
생명을 담보해야만 했던 그들에게 언덕아래 남해의 아름다움이 숫자로, 또는 오늘날의 풍요로 계산될 수 있을까, 보이는 숫자로 계산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영원’ , 만져지지 않는 그 힘에 이끌려 생명을 걸고 엄청난 결단을 살아 낸 얘기들로 감히 영원으로의 이주 경로를 설명할 수 있을까!
풍요로운 서울이다. 다 잔칫집 같다. 백화점 유명 명품점앞에는 제법 돈 주머니를 챙겨 왔다는 듯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입장할 차례를 기다린다. 왼만한 산들은 다 밀어내어 오똑오똑 낯선 서양 이름의 아파트들을 짓느라 전국은 온통‘ 공사중’이다.
아이들이 열쇠를 차고 다니며 드나들던 집을 이제는 몇 개의 넘버로 디지털 문을 열고 어린이 날 이라고 젊은 엄마 아빠들은 아이들 손잡고 해외로 나들이 가고, 어버이날이
라고 어르신들은 왁짝왁짝 동남아로 쌈직한 효도 여행 줄이다. 뿐이랴, 전에는 큰 기침하며 폼잡으시던 어르신들을 뒤에서는 꼰대라 할지라도 그래도 그 앞에서는 감히 술병, 술잔들을 기울이지 못하던 것이 언제부터인지 그런 것들이 이젠 아주 시큼 털털한 구닥달이가 되어버린 세태.
게다가 시골에서는 매달 2일마다서는 2일장, 5일마다 서는 5일장 등으로 잔칫집 냄새를 후하게 피워내는 재래장터. 옆구리에 핸드폰을 매달고 중국산 더덕도 국내산이라고
우겨댈 줄 아는 장터 아주머니들의 너스레는 이것 저것 구경하느라 분주하던 나그네 아닌 나그네 같은 우리네 발걸음을 멈추어 서게 하는 게 아닌가!
허리춤에 핸드폰도 차셨는데 그냥 중국산은 중국산, 우리나라 토종은토종이라고 당당하셨더라면 얼마나 내심 든든하고 흐뭇했을까! 세월이많이 지나지 않았느냐고 외려 콱! 얻어 맞는 것 같았다.
과연 어떻게 우리에겐 가난이 힘이었었다고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이 부족함이 없는 시대, 경제대국의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난이 우리의 선생님이었고 길이었다고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풍요로운 세상에서, 어떻게 저 ‘영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 편안치 않은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이것은 분명 우리들 몫이건만!
소곤소곤 얘기하듯 마을을 이루고 있는 언덕에 오르니 잔잔한 음율 이 흐르는 자그마한 카페며, 또 언덕아래 저만치 굽이치고 있는 시퍼런 바닷물은 무엇이 추한 것인지 무엇이 과한 것인지 분별의 분기점을 거듭 거듭 밑줄치듯 이르는데,“…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5-8)” 는 요셉의 목소리가 진심없는 트집과 허잡한 변명들 사이에서이제 그만 시달리자고 타이르는 것 같았다.
가난한 조국의 고통을 신앙처럼 끌어안고 피 같은 눈물과 땀으로 응답하여 경제대국을 이루는 밑거름이셨으니 할렐루야! 그 삶에 우렁찬 찬양이 넘치리라.꽤 오래전 일이라 좀 생뚱스런 감이 없지 않지만 우리가 흔히 쓰는 ‘Better late than never’ (늦었지만 아
주 안하는 것보다 낫다) 라는 말에 힘을 빌어 이제라도 남해 독일마을에 한아름 꽃다발을 보내며, 하늘의 위로와 안식이 새벽 이슬처럼 그 언덕위에 년년세세 이어 지기를!
세상이 아무리 많이 변할지라도 우리는 영원을 이어 가는 대단한 후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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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자/뉴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