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잎 클로버^꾹꾹 눌러쓴 편지… 누군가의 추억·감정 엿볼 수 있어
▶ 30년 전 음악감상실 메모지 발견, 태어나기 이전으로 시간여행도
헌책 속에서 우연히 뭔가를 발견했을 때 드는 감정은 묘하다. 그것이 바싹 마른 낙엽이든 연애편지든, 헌책과 함께 이제 ‘내 것’이 된 물건들은 흥분과 함께 호기심을 유발한다. 시간의 흐름을 타고 타임슬립을 하는 듯한 느낌을 경험하거나 한껏 부푼 타인의 감성을 훔쳐보는 재미도 있다. 때문에 헌책에 실려온 추억을 ‘보너스’라고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사진은 아름다운가게의 헌책방 ‘보물섬’에서 보관 중인 낙엽 책갈피를 촬영한 연출 이미지.
무심코 책장을 넘기다 마른 단풍잎을 발견했다. 누가 언제 끼워두었는지 알 수 없는 낙엽 책갈피, 뜻밖에 찾아온 낭만이 반가워 미소를 지었다.
새 책 속엔 없다. 바싹 마른 나뭇잎이든 비상금이든 오래된 무언가를 우연히 뱉어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헌책뿐이다. 책장 사이에 뭔가를 끼워두고, 끼워둔 사실조차 잊을 만큼 오랜 시간 누군가의 서가에 꽂혀 있던 묵은 책.
헌책은 그러한 방식으로 누군가의 추억을, 그리움을, 경험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퍼 나른다. 연인에게 선물한 책 면지에 적힌 손글씨에서 사랑의 감정을 대리 경험하거나 수인번호가 적힌 교도소의 도서 열독 허가증, 뜻을 알 수 없는 사주풀이 메모를 통해 원 주인의 정체를 짐작해 보는 재미도 있다. 낡은 코팅 책갈피와 한물간 유명 가수의 공연 티켓으로는 찰나의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
매입한 헌책에서 나온 물건들을 SNS에 소개해 온 이효진 한뼘책방 대표는 헌책의 매력을 “우연히 발견한 그 무엇을 통해 다른 사람의 감정과 경험을 엿보는 재미”라고 표현했다. 아름다운가게의 중고서점 ‘보물섬’은 아예 기증받은 책에서 나온 물건들을 모아 매장에 전시하고 있다. 아이디어를 낸 이범택 간사는 “낡고 오래된 물건을 쉽게 버리는 요즘 헌책에 실려 온 추억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라고 강조했다.
이제 이 가을, 헌책에 실려온 소소한 추억들을 엿볼 차례다.
# 시간을 거슬러 온 사랑의 순간
“많은 설레임을 안고서 너에게 책 한 권을…” 아마도 혁은 윤경을 사랑했나 보다. 조심스럽고 은근한 고백을 책 한 권의 선물로 대신한 혁은 “너와 함께 있을 때 세상은 나와 같이 있음을 느낀다”라고 면지에 꾹꾹 눌러 적었다.
시작하는 연인들이 남긴 흔적은 26년 세월을 뛰어넘어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1991. 7. 10’이라는 날짜를 본 순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우연히 펼쳐 본 헌책에서 27년 전 손글씨를 발견한 류은아(30)씨는 “누군가의 사랑의 순간을 엿본 것 같았다. 한때 이런 방식의 고백을 사랑했는데…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라고 말했다. 가수로 활동 중인 류씨는 최근 헌책에 적힌 손글씨를 모티브로 곡을 만들기도 했다.
# 시간 여행으로의 초대장
메모지의 ‘곡명’란이 유난히 넓다. 하단에 ‘젊음에 음악감상실’이라고 찍혀 있고, 날짜가 ‘198…’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1980년대 언저리에 사용하던 것으로 보인다. 신청곡을 적어내면 DJ가 사연과 함께 노래를 틀어주던 그때 그 시절, 메모지의 주인은 아마도 음악감상실을 자주 찾는 철학도였나 보다.
그가 프로이트의 ‘실수의 분석’이란 책에 끼워둔 메모지를 발견한 이는 1988년생 김민혜씨. 그는 메모지를 가리켜 “아마도 내가 태어나기 전에 쓰던 것 같다”라고 짐작했다. 그리고는 “내 손으로 펼쳐 읽고 있는 같은 책을 누군가가 내가 있어본 적 없는 전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봤을 거라 생각하니 신기하면서도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시간 여행을 좀 더 실감하고 싶었던 그는 “전화번호랑 상호로 검색해 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라며 아쉬워했다.
# 추억을 샀더니 헌책이 딸려왔다
윤재헌(27)씨가 지난해 6월 서울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구입한 최영미의 시집은 23년 전 누군가 건넨 이별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책 면지엔 “가면서 읽고 꼭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래”라고 적혀 있었다. 실연의 아픔을 앓던 윤씨에겐 책에 수록된 시보다 면지에 적힌 메시지가 더 눈에 띄었다. 그는 “그땐 외로워서, 위로를 받고 싶어서 이 시집을 골랐는데 읽을수록 너무 뜨겁고 재처럼 타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시보다 시집에 남은 누군가의 추억, 평범한 메시지가 내가 원했던 따스한 느낌에 더 가까웠다”라며 “추억을 샀더니 헌책이 딸려온 셈”이라고 말했다.
# 부치지 못한 편지
“편지를 보자마자 잊고 지내던 친구 얼굴이 떠올랐다.” 친구에게 썼다 부치지 못한 편지를 최근에 찾은 윤혜경(45)의 말이다. “며칠 뒤에 보내야지”하며 소설책 ‘그리스인 조르바’에 끼워둔 채 까맣게 잊은 편지는 26년 후에야 헌책방을 운영하는 지인에 의해 ‘발굴’됐다. 젊은 시절 읽던 책을 한꺼번에 헌책으로 처분한 지 며칠 안 돼서다.
윤씨는 “당시 대학 1학년이던 나는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와 있었고 소영이는 노량진에서 한창 공부를 하고 있을 때”라며 “먼저 대학생이 된 나로서는 재수하는 친구에게 스스럼없이 연락하기가 왠지 쉽지 않은 미묘한 시기였다”라고 회상했다.
‘절친’이었던 소영은 그 사이 연락이 끊겼다. 윤씨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안타깝지만 26년 만에 발견한 편지처럼 언젠가 우연히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이 기사를 소영이가 보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
박서강·김소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