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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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날

2018-10-10 (수) 소 병 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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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문예

아직 아이들은 퇴근 전이다. 하루종일 퉁퉁 부어있는 날씨가 영~ 마음에 안든다. 내 마음에 안든다고 투덜거려 보았자 특별한 대책은 없다. 금방이라도 울음보가 터질것 같은 날씨에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면 이럴 땐 제격인 것이 생각나 부엌으로 갔다 .

어제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에 사는 한인 학부형 할머니를 만났다. 바구니에 채소를 가득 담아 들고 오시며 반색을 하신다 “그러지 않아도 댁에 가는 길이에요, 아주 연하고 부드러워 잡숴 보시라고...“ 하시며 텃밭에서 뜯었다는 상추며 깻잎 , 토종부추 한단을 주시기에 받아가지고 왔다.

마침 집에 쓰다 둔 녹두가루가 생각나 아이들이 퇴근하면 출출해 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부추전이나 부쳐 보려고 재료를 이것 저것 주섬주섬 찿아내 늘어 놓았다. 빨강색 피망 한 개, 느타리버섯 몇 개, 생새우 몇 개 그리고 오늘의 주 재료인 부추를 손가락 마디만한 크기로 잘랐다. 그러고 보니 음식 만들다 조금씩 남아 냉장고 설합을 지키던 재료들이 대강 정리 된 것같다.


적당한 크기의 반병두리에 재료를 모두 넣어 버무리다 문득 그 속에 내 젊었을적 친구들의 얼굴이 한사람씩 스쳐갔다 유치원 부터 아이들이 동창이어서 엄마들 까지 지란지교(芝蘭之交)의 우애를 맺고 지내던 소탈한 성격의 벗들이다. 나이들어 태평양을 건너 이곳 뉴욕에 터를 잡은지 어~언 이십오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친구들의 얼굴은 삼십대 초반의 모습으로 멈춰 떠 오른다 .

둘이 셋이 되고 넷이 되어 모이는 날이면 호들갑 스런 이야기로 시작해 먹거리 까지 펼쳐 진다 .

정희엄마는 통영이 고향이다. 그 친구는 사투리가 심하다. 비가 내릴라치면 영락없이 전화 벨이 울린다 . “ 여보세요 . 승희엄마가? 내다 , 웃째 아침부터 하늘이 꾸지지 우거지 상이래이, 그래 생각 나는게 있어 전화 했제...내 이레 말하믄 니 ~ 뭔지 알제 ? 다른 친구들 한테 연락하래이 !? 모두 우리집에 와가 녹두부침개 부쳐 먹자카래이”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한참 너스레를 떨고 난 뒤였다 .

마치 날궂이 하는 사람들처럼 이런 날이면 우리 그구룹 네 사람 중 다른 친구의 전화벨이 또 울린다. 수화기를 놓기 무섭게 욱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 승희엄마니 ? 어디서 연락 온거 있어 연락 없으면 우리집에 오라구 전화 한거야 ! “ 난 깔깔 웃으며 “ 지금 막 정희엄마 한테서 전화 왔었어”

“ 뭐 라고 ? “ “ 뭐 라고는,! 찌뿌드한 날씨에 제 집에 와서 부침개 부쳐 먹자더라.” “ 참~ 잘 됐네 그럼 행차 해야지 ” 성격 급한 욱이엄마는 그 말을 끝으로 , 내 수화기에선 윙-하고 튕겨진 기타줄 소리 처럼 긴 여운만 들릴 뿐이었다 .

정희엄마 부침개는 항상 푸짐하다 .새우를 넉넉하게 넣은 위에 붉고 푸른 청양고추, 파란 실파의 마지막 장식은 식욕을 돋구기에 충분하다. 노릇하게 지져진 부침개를 훌쩍 뒤집어 커다란 접시에 담아 놓으면 근사한 요리처럼 맛스럽게 보인다. 그럴때 석이엄마가 한마디 거든다 .

“ 그냥 먹기는 아깝다. 맥주 한잔 쭉-하면 어떨까 ? “
기다렸다는 듯 정희엄마는 “웃째 아뭇쏘리 안하나 했다 카이 ! 냉장고 열믄 오른쪽에 있다.갔다 묵으라 , 시--원 할끼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구동성으로 “ 금상첨화 (錦上減花)지” 하고 까르르 웃곤 했다.
여러 재료들이 내 손 끝에서 섞여지고 40여 년 전 친구들 얼굴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자 중학생인 막내손자가 “할머니 재미있어 ? 뭐하시는거에요“ “응-- , 빈대떡 부치려고....”
왜 , 빈대떡이라고 해요.” 하고 묻는다. “ 그게 옛날에 가난한 사람들이 해서 먹는다는 빈자(貧者)라는 어원에서 생긴 말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빈대떡으로 변화된 말이란다 . 폄 (貶 )하는것 처럼 들리지만 할머니들 세대에선 정(?)스럽게 들리기도 한단다.”

내 속내를 모르는 손자는 지금 하고 있는 내 작업이 재미 있어 웃는 줄 알고 던지는 질문이다 . “ 응, 재미도 있고, 있다가 엄마 아빠 집에오면 맛있게 먹을거야, 이런 생각들이 재미 있는거지,”


한참을 손자와 대화를 하는동안 굵은 빗방울이 거실 유리창에 부딪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

마침내 응등그러졌던 하늘이 늦게 터진 모양이다 .
요새 날씨는 묘하다. 요동치는 북 ,미 관계만큼이나 요란하고 변덕스럽다 .
먹구름이 뒤덮인 틈없는 하늘에서 비가 제법 올 모양새다.아침에 손자 운동화를 빨아 바람에라도 마르라고 뒷곁 평상에 엎어놓았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개인날 보다 흐린날이 많은 요즘은 태풍까지 덮쳐 밖에 내다 놓은 화분들이 동그라지고 가끔 알밤 처럼 굵은 도토리가 평상위로 떨어져 툭탁 데그르르 구른다 ,가을의 소리다.

마지막 부침개가 거의 익어갈 무렵 밖에서 자동차 파킹하는 소리가 들린다 딸 내외의 두런 거리는 소리에 맞추어 현관문에 매달린 종 소리가 반갑게 젊은 주인들을 맞는다 .

안으로 들어선 딸 내외, “ 으 ~음 구수한 냄새 , 엄마의 비 오는날 행사 ,추억의 부침개?” 라고 말하는 그둘을 쳐다보며 나는 빙긋이 웃었다. 딸도 웃고, 사위도 웃었다 .

<소 병 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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