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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칼럼] 911 과 십자가

2018-09-20 (목) 김문철 목사/천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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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9월 11일이 되면 17년 전의 9월 11일이 소환되어 떠오른다. 그날 나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병실에서 뉴스를 통해 세계무역센터가 납치된 여객기에 공격당하는 것을 보았다. 곧 이어 110층의 거대한 빌딩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폭삭 붕괴되는 것도 보았다. 나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경악했다. 간호사 한 명은 종말이 온다며 두려움에 떨었다. 내 병실 룸메이트였던 젊은 백인 청년은 당장 군대에 지원해 배후세력을 죽여 버리겠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그만큼 충격이어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테러였다.

미국은 즉각 붕괴된 빌딩 잔해 속에서 생존자 구조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구조 작업이 시작된 지 며칠 후 잔해 속에서 약 6 m 크기의 철근 십자가가 발견되었다. 물론 빌딩이 무너지면서 철근 기둥이 십자가 모양으로 잘려 생겨난 것이다. 이 십자가가 발견되자 미국은 물론 온 세계가 감동한 듯했다. 참혹한 비극 중에도 위로와 소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 철근 십자가는 구조 현장 인근에 세워져 911의 비극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십자가가 힘을 발휘하는 곳은 정해진 듯하다. 고난과 죽음이 있는 비극의 현장과 같은 곳이다. 실제 십자가의 역사성이 그런 배경을 갖고 있다. 성경시대에 반역자와 같은 중죄인들에게 최고의 고통으로 죽도록 만든 사형 틀이 십자가였다. 따라서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과 죽음 당하신 후 십자가의 메시지는 180 도 바뀌었다. 위로와 소망은 물론 생명으로 가득 찬 승리로 변했다.


하지만 십자가는 여전히 911과 같은 비극의 현장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실제 현실적으로도 십자가가 가장 많이 발견되는 곳은 교회, 장례식, 묘지, 그리고 병원과 같은 곳이다. 모두가 고난과 아픔 그리고 죽음과 관련된 곳이다. 만일 환갑잔치에서 십자가를 선물로 받는다면 어떻게 해석할까? 아마도 죽음이 연상 되어 불쾌해 하지 않을까?

그러면 성공과 감사, 흥분과 환희가 넘치는 곳에는 십자가가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십자가의 메시지일까?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비극 속에서 위로와 소망을 주기 위함 뿐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과 은혜 정의와 공평을 회복해 인생에게 생명이 솟아나는 기쁨과 축제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을 넘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생명의 힘을 발휘하는 능력의 근원이요 승리방정식이다.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교회당 꼭대기에 걸린 십자가를 가끔 본다. 만일 그 십자가의 기능이 단순히 종교성을 강조하거나 비극을 극복하게 만드는 정도일까? 아니다. 십자가는 교회당. 장례식, 묘지, 그리고 911 비극과 같은 고난과 죽음의 현장을 넘어선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더 이상 고난과 죽음의 주인공으로 달려 있지 않음이 그 증거다. 주님은 부활하셨다. 그것은 생명이고 축제다.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 16:24) 고 하실 때의 “자기 십자가” 는 고난이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 십자가는 생명의 기쁨과 축제까지도 포함한 삶의 전 영역을 말한다. 삶의 전 영역을 주님의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살아가라는 초청이다. 약해 보이지만 사단의 세력조차 막을 수 없는 가장 강한 길이 십자가의 도다. 십자가 역설이다.

해마다 9월이 되면 911 과 철근 십자가가 겹쳐 떠오른다. 그리고 비극을 위로와 소망을 갖고 극복하게 만든 철근 십자가의 능력이 은혜롭고 감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기 전 역동의 현장속에도 십자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본다. 돈과 힘이 솟구치는 곳 이어도 겸손과 사랑이 기초가 되지 않았을까? 부디 911의 십자가가 비극을 기억하는 상징을 넘어 온 세상의 모든 현장 속에서 십자가의 역설을 알리는 메시지가 되기를 기도한다. 약하지만 강하게!

<김문철 목사/천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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